속성은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 호는 혜철(慧徹). 혜철(惠哲)은 법명이며, 동리화상(桐裏和尙)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22세 때 비구계를 받았다.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수선하였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地藏)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다.
기록의 ‘혜’자는 그의 법호인 혜철(慧徹)의 기록으로 전한다. 그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외국인으로 중국땅을 멀다 않고 와서 법화(法化:진리로써 교화함)를 청하였다. 뒷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
그는 뜻이 굳고 품성이 영명하여 지장을 만나는 즉시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
그 때 만백성과 군왕이 그의 귀국을 반기는 상황을 태안사(太安寺) 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산중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에야 돌아오도다. 나라가 보물을 얻음이라.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인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지금의 泰安寺)에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 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
861년에 입적하자 왕이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명은 조륜청정(照輪淸淨)으로서 872년에 세워졌으며,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의 태안사에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도(門徒)로는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여선사(如禪師)와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 인이 있어 가풍을 크게 일으켜 선문 9산 중의 동리산문을 형성, 개창조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