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철 ()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동리산파의 개조인 승려.
이칭
체공(體空)
혜철(慧徹)
시호
적인(寂忍)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785년(원성왕 1)
사망 연도
861년(경문왕1)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구산선문 중 동리산파의 개조인 승려.
개설

속성은 박씨(朴氏). 자는 체공(體空), 호는 혜철(慧徹). 혜철(惠哲)은 법명이며, 동리화상(桐裏和尙)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22세 때 비구계를 받았다.

생애와 활동사항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수선하였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地藏)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다.

기록의 ‘혜’자는 그의 법호인 혜철(慧徹)의 기록으로 전한다. 그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외국인으로 중국땅을 멀다 않고 와서 법화(法化:진리로써 교화함)를 청하였다. 뒷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

그는 뜻이 굳고 품성이 영명하여 지장을 만나는 즉시 심인(心印)을 전수받았다.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

그 때 만백성과 군왕이 그의 귀국을 반기는 상황을 태안사(太安寺) 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산중에 사람이 없더니 오늘에야 돌아오도다. 나라가 보물을 얻음이라.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귀국 후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인 무주(武州) 동리산(桐裏山) 태안사(太安寺:지금의 泰安寺)에 머무르면서 교화를 폈다. 이 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

861년에 입적하자 왕이 적인(寂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탑명은 조륜청정(照輪淸淨)으로서 872년에 세워졌으며,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의 태안사에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도(門徒)로는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여선사(如禪師)와 광자대사(廣慈大師) 등 수백 인이 있어 가풍을 크게 일으켜 선문 9산 중의 동리산문을 형성, 개창조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신라의 불교사상」(김동화, 『아세아연구』3, 1965)
「해동조계종의 연원 및 그 조류」(고형곤, 『학술원논문집』 9, 1970)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