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의 자(字)는 체공(體空)이고, 호는 혜철(慧徹), 법명은 혜철(惠哲)이며 『조당집』에서는 동리화상(桐裏和尙)이라 하였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주 출신이다. 조부 때는 삭주 선곡현(善谷縣, 현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에 정착해 살았다. 선사가 본래 왕경 귀족 집안이었지만, 정치권에서 밀려 낙향한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15세에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익히고 22세 때 비구계를 받았다.
814년(헌덕왕 6)에 입당하여 공공산(龔公山)의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을 찾아 가, “뒷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신라에 아직 남종선이 전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가 선(禪)을 배우기 위해 입당했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서당지장으로부터 조사선을 배우고 그 선법을 받았다.
서당지장이 입적한 후 명산과 신령스러운 곳을 두루 다녔으며, 이후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머물면서 다시 화엄을 공부하였고 이때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며 탐구하였다. 이에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는, 즉 교와 선을 융섭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839(문성왕 1)년 봄에 신라로 돌아와 무주(현 광주광역시) 쌍봉사에서 하안거를 보냈는데, 이때 매우 가물었는데 선사가 향을 사르고 기도하자 비가 내렸다고 한다. 또 이옥(理嶽)의 암자에서 수도하는 동안 화재로부터 암자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후 선사는 주석할 곳을 물색하던 중 곡성군 동리산(桐裏山)의 태안사(太安寺:지금의 泰安寺)를 보니 삼한에서 수승(殊勝)한 곳이라 이곳을 택해 동리산문을 개창하였다. 돈교 · 점교를 닦는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문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자주 글을 내려 위문하였으며, 절 사방 밖에 금살당(禁殺幢)을 세우게 하였다.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물었는데, 선사가 봉사(奉事) 약간의 조항을 올려 조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봉사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841년 장보고의 죽음과 그로 인해 무주 일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 지역 통치와 관련된 봉사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정치에 급한 일인지라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라는 「적인대사탑비」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듯 선사와 문성왕의 관계가 특별했으며, 금살당 설정은 금살당 내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이러한 왕실의 지원이 동리산문이 확장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선사는 861년(경문왕 1)에 입적하였으며, 868년(경문왕 8)에 왕은 탑비 건립을 명하였고, 시호를 내려 적인(寂忍), 탑명을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하였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은 선사가 입적한 861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는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으며, 탑비는 파괴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다행히 구례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필사본을 통해 비문을 알 수 있으며, 현재 태안사에 있는 탑비는 근래 복원한 것이다.
제자의 수가 100여 명이 넘었으며, 그중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이어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 864~945)가 출현하여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동리산문이 더욱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