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 )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비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비
고대사
유물
872년 곡성 태안사에 경문왕의 명령으로 세워진 적인선사(寂忍禪師)의 탑비.
이칭
이칭
대안사적인선사탑비(大安寺寂忍禪師塔碑)
정의
872년 곡성 태안사에 경문왕의 명령으로 세워진 적인선사(寂忍禪師)의 탑비.
개설

적인선사탑비는 왕명으로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으며, 한림랑(翰林郞) 최하(崔賀)가 글을 짓고, 중사인(中舍人) 요극일(姚克一)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적인선사의 생애와 가계, 사상으로 중도(中道)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선사상과 동리산문의 형성을 담아 놓았다. 또한 『화엄경』에 근거한 신앙으로서의 신중법석(神衆法席) 등을 담아 놓았다.

내용

탑비의 서문에서 최하는 적인선사가 공(空) 가운데 유(有)를 설하고 색(色)의 경계에서 공을 아는 즉 중도(中道)사상의 이치를 체득하였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6진(塵)을 청정히 하여 십지(十地)보살의 지위를 넘은 즉 성불의 경지에 이른 성인으로 평가하였다.

본문에서 최하는 적인선사의 생애와 활동을 서술하였다. 선사의 법명은 혜철(慧徹)이며, 자는 체공(體空)이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서울(지금의 경주) 출신이었다. 하지만 조부 때에 삭주 선곡현(朔州 善谷縣: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것은 적인선사가 왕경의 귀족 집안이었지만, 정치권에서 밀려나 낙향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785년(원성왕 1)에 출생하여 15세에 부석사(경상북도 영주 소재)로 출가하였는데, 아마도 영월과 영주가 지리상으로 멀지 않은 데 연유한 듯하다. 부석사에서는 『화엄경』 교학을 익혔는데, 당시 동료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줄 정도로 총명하였다. 22살에 비구계를 받고, 이후 계율을 소중히 하고 선(禪)을 수행하니 다른 승려들의 귀감이 되었다. 마침내 선사의 지혜는 법이 본래 공(空)하면서도 또한 공하지 않는(非空) 곧 중도사상의 이치를 깨닫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선사는 814년(헌덕왕 6)에 중국에 유학하여 공공산(龔公山)의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선사는 지장을 만나 가르침을 청하면서 훗날 “설하는 바 없이 설하고(無說之說), 법이 없는 중에 있는 법(無法之法)이 해동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다.”고 하는 포부를 밝혔다. 이에 지장은 그 뜻을 갸륵히 여기고 곧바로 심인(心印)을 전수하고 가르쳤다. 오래지 않아 지장이 입적하니, 산을 떠나 천태산 국청사(天台山 國淸寺)를 비롯 중국의 명산대찰을 두루 순례하였다. 특히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서는 3년 여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면서 경전의 이치를 궁구하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후 55세가 되던 839년(신무왕 원년)에 귀국하여 환영을 받았는데, 최하는 이를 평하여 “불타의 지혜와 달마의 선법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주(武州: 지금의 전남 지역) 관내 화순의 쌍봉사(雙峰寺)에 머물며 선사상을 펼치면서, 무주 관청의 요청에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또 지리산에서 수행할 때는 산불 속에서도 홀로 남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곡성 지역의 동리산(桐裏山) 대안사(大安寺)가 불법을 선양할 좋은 곳임을 알고 산문을 개창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여 가르쳤다. 이를 두고 최하는 도가의 진인(眞人)들이 모여 살았다는 나부산과 육조 혜능(慧能)대사가 설법을 펼친 보림사가 있는 조계산에 비유하여 선사의 뛰어난 깨달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에 문성왕은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설치하는 한편으로, 정치의 정도(正道)를 청하여 물어 왔고 선사가 봉사(奉事) 약간조를 올리니 왕이 가상하게 여겼다.

861년에 입적하자 제자들이 송봉(松峰)에 부도를 모셨다. 868년(경문왕 8)에는 왕이 선사의 행적을 듣고, 시호를 적인(寂忍) 탑명을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하여 선사의 자취를 글로 새길 것을 명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선사의 업적을 요약한 송(頌)으로 결론을 지었다. 부록으로 대안사의 복전(福田)과 논 밭 임야 노비의 수 등 경제 사항을 수록하여 놓았다. 더불어 대안사에서는 항시 신중법석(神衆法席)을 행하였다. 이는 『화엄경』 세주묘엄품에 나열된 신중단(神衆壇)을 모시어 명호를 부르며, 신중들의 가피를 받고자 염원하는 것이다. 이로서 적인선사가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보현행원신앙을 펼쳤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적인선사는 교학으로는 화엄경과 대장경을 독파하고, 선사상으로는 중도사상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선사는 선교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선사는 신중법석을 행하였는데, 이는 선사가 대중을 지혜를 실천하는 신앙세계로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현황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탑비는 파괴되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는데, 비문은 구례 화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필사본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지금의 곡성 태안사에 세워진 것은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다행히 선사의 부도는 잘 보전되어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적인선사가 활동한 신라 하대에 국왕들은 선사들을 초빙하여 가르침을 받으면서 교와 선의 차이를 물었다. 이에 대해 선사들은 다르지 않다고 답하였으니, 이는 당시 국가가 교학사상과 선사상의 차별화에 대해 매우 의식한 사실을 짐작케 한다. 이 점에 미루어 당시 국가의 관심을 받은 선사들은 선교일체의 사상적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같은 점에서 본 탑비의 건립은 선교일체를 이룬 적인선사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현창하려는 목적에서 이룬 것으로서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나말여초에 크게 번성한 동리산문의 초기 형성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한국 선사상의 조류를 엿볼 수 있다. 더욱 대안사의 토지와 노비 수 등을 담아 놓았는데, 이는 신라 말 사찰의 경영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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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선종사상사연구』(김두진, 일조각,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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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말려초 선종사상사 연구』(추만호, 이론과 실천, 1992)
『태안사지』(한국학문헌연구소, 아세아문화사, 1984)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이기동, 일조각, 1981)
「신라 골품제사회의 정치변동과 불교」(곽승훈, 『한국고대사탐구』 17, 2013)
「신라말 동리산문에 대한 연구」(이덕진, 『 한국선학』 2, 2001)
「동리산문의 선사상」(박문기, 『한국불교학』 16, 1991)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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