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석탑사리합기(閔哀王石塔舍利盒記)는 흑칠한 납석제의 원형 항아리[盒]의 외면에 가는 선으로 7자 38행의 공간을 만들고, 발원문을 해서로 음각하였다. 발원문에 따르면, 석탑은 경문왕이 죽은 민애왕의 추복을 위해 조성한 것으로, 동화사의 주지로 여겨지는 심지(心智)와 융행(融行) 대덕이 주도하였으며, 한림(翰林) 이관(伊觀)이 발원문을 지었다.
심지는 헌덕왕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이 경우 그는 민애왕과 4촌형제가 된다. 그리고 민애왕과 경문왕은 하대 신정권을 열은 원성왕의 후손으로 각각 그 장자인 인겸계와 3자인 예영계가 되며, 항열로는 조부와 손자 관계가 된다. 그런데 두 집안은 희강왕과 민애왕 사이에 벌어진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서로가 인과응보를 주고받았다. 이런 점에서 본 사업은 서로의 숙원(宿怨)을 풀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
흥덕왕 사후 벌어진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한 희강왕이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흥덕왕의 조카인 민애왕이 궐기하여 그를 시해(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에 예영계로 희강왕의 4촌인 신무왕이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럼에도 두 집안은 혼인관계를 통해 서로가 인척관계에 있었다. 경문왕의 할아버지는 희강왕이지만 할머니는 추봉된 선강대왕(善康大王: 충공)의 딸로 민애왕과는 오누이가 된다. 따라서 민애왕은 경문왕의 외증조부가 된다. 또 장인인 헌안왕의 왕비 역시 선강대왕의 딸로서, 헌안왕과 민애왕은 8촌이면서도 처남 매제가 된다. 이렇듯 두 집안은 애증이 얽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경문왕이 민애왕의 추복을 빌고, 그 사업을 민애왕의 4촌인 심지 대덕이 주재한 것은 두 집안의 화해와 결속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이 사업은 경문왕대에 원성왕을 추모하는 대숭복사의 중창사업과 함께 미루어보면, 앞서 말한 두 집안의 화해를 넘어 범원성왕가(凡元聖王家)의 단합을 위한 것으로서 의의가 있다.
나아가 발원문에 “업장을 없애고 이물(利物)을 널리하는 것은 탑을 세우고 예참행도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보현행 가운데 여러 부처님께 경배하고 업장을 참회하는(禮敬諸佛 懺悔業障) 실천을 다짐한 것이다. 다음 ‘연대지업(蓮坮之業)’을 쌓고자 하였는데, 연화대좌 즉 그 대좌에 앉아 있는 비로자나불에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연화장세계 즉 비로자나법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탑이 위치한 비로암의 비로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과 석탑의 조성이 보현행원신앙의 염원을 함께 담은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어린 아이가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들어 성불한 뜻을 본받아 탑을 조성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 법화경』 방편품의 내용에서 취한 것이다. 더욱 사리호는 3개의 작은 목탑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조탑공덕경인 『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하여 조성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로서 이 석탑은 여러 경전의 뜻을 모아 조성한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그리고 이 일의 실무는 유나인 순범(純梵)과 심덕(心德), 그리고 영충(永忠)이 맡고, 사무는 대사 창구(昌具)가 전담하였다. 장인은 범각(梵覺)이었다.
이 사리합기는 1960년대 초 도굴되었으나, 회수된 뒤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또 사리호를 둘러 싼 금동합 4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리합기는 조탑공덕을 통일신라시대에 주로 이용한 소의 경전인 『무구정경』 내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법화경』에서도 그 뜻을 취하고 보현행원신앙을 담고 있는 것은 신라 불교의 또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나아가 경문왕대에 범원성왕가가 용서와 화해를 통한 은원(恩怨)을 풀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