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 석당기는 818년(헌덕왕 10)에 신라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세운 석당의 기록이다. 이차돈순교비, 이차돈공양비라고도 부른다. 높이 104㎝이고, 너비는 29㎝로 6면 석당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으로 시작하여 흥법을 위해 법흥왕과 이차돈의 모의, 이차돈의 순교와 신이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지만,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하대의 정치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분열을 귀족들의 합심으로 극복하고 중고신라시대의 정신으로 복귀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6면으로 조성된 이 석당은 불교의 6바라밀다(婆羅密多)를 상징한 것이다. 이는 불교가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크다는 신라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비의 첫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는 장면 즉 목에서 우유빛의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는 장면을 조각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법흥왕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불법(佛法)을 함께 세울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 때 이차돈이 왕을 돕고자 하여 하문을 요청하였으나, 왕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왕은 불교가 유행하게 되면 나라는 풍요롭고 백성은 평안하며, 삼국을 통일하고 국토를 넓힐 수 있다고 한다.
이차돈이 비밀히 계책을 아뢰니, 왕은 권도(權道)를 삼겠다고 한다. 이에 따라 법흥왕은 사방에 검사들을 배치하고 말하기를 “신하들이 불법을 믿기 위해 절을 지으려는데 고의로 (막으니) 찬적(簒賊)이다.”라고 하였고, 신하들은 절대로 반역의 뜻이 없다고 하면서 맹세하였다. 왕이 위촉을 불러 물으니 답하지 못했고 유사에게 명하여 목베도록 하였다.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젖이 솟아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끝부분에서는 766년(혜공왕 2)에 이차돈의 무덤 앞에서 노백(老魄)과 유혼(幼魂)이 출현하여 대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옛날에 불법을 일으키려는 왕이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법흥왕을 의미한다. 그런데 766년은 768년(혜공왕 4) 대규모의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앞서는 해이다. 이는 비석의 건립이 당시 혼백의 출현과 관계가 깊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비석 건립의 추진을 담당하였을 국□(國□) 법주(法主) 등의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국통 혜융(惠隆)과 법주 효원(孝圓) 등이 큰 비를 세웠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점에서 보아 백률사석당기의 건립은 국가에서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석당기의 내용은 비를 세운 전년도에 남간사(南澗寺) 승려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비슷하면서도 경향이 다르다. 일념의 글이 이차돈의 신이(神異)한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면, 본 석당기는 국왕의 위엄을 매우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당기는 일념의 글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국가의 의도에 따라 유학자에 의해 고쳐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백률사석당은 높이 104㎝이고, 너비는 29㎝로 6면 석당으로 되어 있으며,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 이차돈공양비(異次頓供養碑) 라고도 부른다. 본래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소금강산 백률사터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비문은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지만, 원화첩(元和帖)과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차돈의 순교이야기를 통하여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하대 전기에 신라불교의 발전에 공헌한 10인의 성인을 소조상(塑造像)으로 빚어 흥륜사 금당에 봉안함과 동시에 그 뜻을 기리는 추모비를 세웠다. 백률사석당기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중대 말 하대 초의 정치변동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분열을 귀족들의 합심으로 신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삼국통일을 이룬 중고신라시대의 정신으로 복귀하여 다시 발전을 도모하자는 뜻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