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다는 고려 전기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의 제3조인 승려다. 혜철의 제자인 여선사에게 선법을 익혀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고려 태조의 초청을 받아 흥왕사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왕자 왕욱이 제자가 되는 등 왕실과의 관계가 돈독하였고, 동리산문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후 태안사로 돌아와 945년에 입적하였다. 제자들에게 계율을 강조하고, 선을 익히면서 경전에도 의지하는 선·교융합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탑과 탑비 건립을 명하였고, 태안사에 세워져 있다. 시호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이다.
윤다의 자(字)는 법신(法信)이며 865년(경문왕 5) 4월 5일에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까지는 귀족으로 고관을 역임하였으나 신라 말 난리가 나서 몰락하였다.
8세에 집을 떠나 사방을 다니다가 태안사가 있는 동리산에서 상방화상(上方和尙), 즉 여선사(如禪師)를 주1 제자가 되었다.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일심으로 주2 주3를 깨닫고 주4를 통달하였다.
여선사는 동리산문의 개조인 혜철의 제자로, 서당지장-혜철-여선사로 이어지는 동리산문의 법맥이 윤다에게로 이어져 동리산문의 제3조가 되었다.
윤다는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는데, 신라의 효공왕은 주5를 보냈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어 운다를 대궐로 청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왕은 기뻐하면서 의빈사(義賓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 때 임금에게 국가의 행복이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태조는 대사를 흥왕사(興王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후 태조의 아들이자 성종의 부친이 되는 황주원(黃州院) 왕욱(王旭)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곧 왕의 허락을 얻어 동리산으로 되돌아갔다. 왕의 주7를 받으면서도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945년에 제자들을 불러, “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정중히 받아들여라. 부처님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을 너희에게 주8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고 말한 후 주9.
선승이면서도 임종 때까지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할 만큼 율법을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무학(無學)의 종자인 선(禪)을 배우되 경전의 게송에 의지하고, 무사(無師)의 취지를 스승으로 하되 주10, 즉 경전을 가자(假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선교융합의 사상은 혜철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