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승(禪僧). 자는 법신(法信). 경상북도 경주 출신.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제3조이다. 8세에 집을 떠나 사방으로 다니다가 총림(叢林)인 동리산에서 선(禪)을 수행하였다.
이 때 그는 동리산파의 개산조인 혜철(惠哲)로부터 “도는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부처는 곧 마음에 있는 것이니, 오랫동안 익히면 찰나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을 얻었다.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 일심으로 참구하여 묘지(妙旨)를 깨닫고 현기(玄機)를 통달하였다.
이 때부터 현풍(玄風)을 크게 떨쳤는데, 신라의 효공왕은 조서를 보냈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대궐로 청하였다. 그가 도착하자 왕은 기뻐하면서 의빈사(義賓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 때 임금에게 국가의 행복이 무엇이고 백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 뒤 왕은 흥왕사(興王寺)황주원(黃州院)에 머무르게 하고 극진히 보살폈으나, 곧 왕의 허락을 얻어 동리산으로 되돌아갔다.
945년에 제자들을 불러, “생은 유한하고 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니 너희들은 정중히 받아들여라. 부처님이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가 너의 큰 스승이라 하셨는데, 나 또한 이 말을 너희에게 부촉하노니 너희들이 잘 받들어 행한다면 나는 죽지 않은 것이 되리라.” 한 다음, 입적하였다.
그는 당나라 지장(智藏)의 법을 이어받은 동리산파 개산조 혜철로부터 여선사(如禪師)에게 전해진 법맥을 이어받았다.
선승이면서도 임종 때까지 계율로써 스승을 삼으라고 당부할 만큼 율법을 중시하였고, 왕의 빈례를 받으면서도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비는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태안사(泰安寺)에 있다. 시호는 광자대사(廣慈大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