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은 스승과 제자가 마음으로 불법의 도리를 주고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심전심의 유래는 석존이 영취산에서 팔만의 대중에게 꽃을 들어보였지만 오직 가섭만 미소를 지어보였다는 염화미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이심전심은 정법안장의 도리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에 의거하여 마음을 깨달은 사람에게 전승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이심전심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선문답 및 법어 등에서 상대방이 서로 마음을 이해하고 교감하는 방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심전심은 선종에서 중요시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부촉(咐囑)하는 방법을 표현한 말이다. 불립문자가 부정적인 표현 방식임에 비하여 이심전심은 긍정적인 표현 방식에 해당한다. 선수행의 목표는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깨달음을 유지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뉘는데, 그 후자에 대하여 선종사에서 깨달음의 전승 방식으로서 어떻게 전승하고 유지해갈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고안된 방법이 전등(傳燈)의 문제였다.
전등은 등불을 전승한다는 뜻으로 깨달음을 비유한 것인데, 그 전승 방식으로 내세운 것이 이심전심 또는 이법인법(以法印法)으로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서로 계합되어 인가한다는 뜻에서 심심상인(心心相印)이라고도 한다. 돈황본 『단경(壇經)』에서는 전등의 계보를 과거칠불(過去七佛)로부터 비롯하여 인도의 28대 조사 및 중국의 6대 조사에 이르는 그 명칭을 정립하였다. 이후 『보림전(寶林傳)』으로 계승되면서 이심전심으로 계승되었던 정법안장의 유통을 기록하면서 조사들의 법어를 포함시켜서 소위 남종선의 전등 계보를 확정하였다.
선종사에서 이심전심의 유래는 석존이 영취산에서 팔만의 대중에게 꽃을 들어보였지만 오직 가섭 한 사람만 미소를 지어보였다는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이후에 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정법안장을 전승하는 상징으로 정착되었다.
“그때 여래가 그 보좌에 앉아서 이 연꽃을 받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만 꽃을 들었을 뿐이었다. 법회에 참석했던 팔만 사천의 인간 세계과 천상 세계의 당시 대중이 모두 멈추고 침묵하였다. 이에 장로 가섭 존자가 부처님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는 불사(佛事)를 보고, 그 자리에서 확연해져 파안미소(破顔微笑)하였다. 부처님이 곧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한테 정법안장(正法眼藏) · 열반묘심(涅槃妙心) · 실상무상(實相無相) · 미묘법문(微妙法門) · 불립문자(不立文字) ·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다. 그것을 모두 지니고 활용하면 범부라 할지라도 성불하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된다. 이제 바야흐로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 말을 마치고는 침묵하였다.”(『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 권1, 만속장 1, p. 442 상)
이심전심은 문자를 배격하거나 문자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안장의 도리야말로 마음을 깨달은 사람에 의거하여 마음을 깨달은 사람에게 전승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방식이다. “보리달마가 천축에서 정법안장을 계승하여 몸소 중화에 도래하여 보니, 이곳의 학인들은 대부분 법을 터득하지 못하고 오직 명수(名數)로만 이해하고 사상(事相)으로만 수행을 삼고 있었다. 달마는 달이 손가락에 있지 않고 법은 곧 자신의 마음임을 알려주려고, 단지 이심전심과 불립문자의 방식으로 종지를 드러내어 사상(事相)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려는 까닭에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라는 말을 내세운 것이지 결코 문자의 설명을 벗어나 해탈을 설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교수법에 통달한 자는 항상 금강경과 능가경을 찬탄하여 ‘두 가지 경전은 자기 마음의 요체이다.’라고 말했다.”(『도서(都序)』 권 상, 『대정장』 48, p.400 중)
이심전심은 서로 간에 무언의 설법과 교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보편화되었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유마거사(維摩居士)와 문수보살(文殊菩薩) 사이에서는 유마가 침묵하자 문수보살이 이심전심의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달마어록(達磨語錄)』에서는 피육골수(皮肉骨髓)의 법문으로 달마가 혜가에게 전법했을 경우에는 혜가가 이심전심의 방법으로써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용록(從容錄)』에서는 세존이 법좌에 올라가 침묵으로 이심전심의 도리를 전하자 문수가 그것을 이해하였다.
처음에 선의 궁극 목표에 해당하는 정법안장을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승하고 실천하는 방식으로 제시된 이심전심은 점차 사자상승(師資相承) 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선문답 및 법어 등에서 문답의 주체와 객체 및 설법자와 청법자 등 상대방이 서로 마음을 이해하고 교감하는 방식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선종에서는 석가모니와 마하가섭 사이의 이심전심의 방식을 표준으로 정하여, 이후에 역대조사들이 깨달음을 인가(印可)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선종의 역사에서 이심전심의 일화로 설정되어 있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의 염화미소(拈花微笑), 다자탑전(多子塔前)의 분반좌(分半座), 사라수하(娑羅樹下)의 곽시쌍부(槨示雙趺)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는 용어는 중국 선종에는 보이지 않고, 고려시대 각훈(覺訓)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 처음으로 보이는 개념이다.
이후에 조선시대에는 벽송(碧松) 지엄(智嚴)의 『훈몽요초(訓蒙要抄)』와 청허(淸虛) 휴정(休靜)의 『선가귀감(禪家龜鑑)』과 백파(白坡) 긍선(亘璇)의 『선문수경(禪文手鏡)』과 초의(草衣) 의순(意恂)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등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