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익(李鍾益, 1912~1991)은 강원도 양양군 출신이고 호는 법운(法雲)이다.
이종익은 보통학교(普通學校)를 다니다가 13세부터 몇 년 동안 유학자인 박동산(朴東山)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모친이 돌아가신 후 설악산 오세암에 있던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21세 때인 1933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전통적 강원 교육인 이력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당시 대표적 학승인 박한영(朴漢永, 1870∼1948)에게도 수학하였다.
새로운 불교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한 이종익은 27세 때인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다음 해에 교토에 있는 임제종전문학교(현 하나조노대학(花園大學))에 들어갔고, 다시 도쿄에 있는 다이쇼대학(大正大學) 불교학과에 편입했다. 이 무렵 가나자와 문고(金沢文庫)에 있던 보조 지눌의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를 발견하여 이를 필사해 왔다. 1944년 다이쇼대학을 졸업한 그는 귀국하였으며, 그 후 서울 봉은사에 머물면서 강원의 강주(講主)를 맡았다.
이종익은 1945년 해방이 되자 봉은사에서 불교중앙청년동맹을 결성했고 1946년 5월에는 불교혁신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현실적 제약 속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는 결국 환속(還俗)하여 불교 대중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종익은 1948년 배영대학관(培英大學館, 현재의 경희대학교) 강사, 1951년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1954년 서울 대각사에서 불교 교리 강좌를 개설하고 신행 단체 대각회(大覺會)를 이끌었다. 1955년에는 불교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조 지눌을 종조(宗祖)로 삼자는 보조 종조론(普照宗祖論)을 강하게 주장했다. 1968년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1975년 「한국불교의 연구-고려 보조국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다이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퇴임 후 동방사상연구원을 설립해 운영했고, 조계종 전국신도회 부회장, 불교 중앙 상임포교사 등을 역임했다.
이종익은 저술로는 『동양철학개론』, 『조계종사』, 『대한불교 조계종 중흥론』 등의 학술서와 『의상대사』, 『사명대사』 등 포교서 17종이 있고 불교와 역사 관련 논문도 50여 편 썼다.
이종익은 가나자와 문고에 있던 지눌의 『화엄론절요』를 국내에 알린 것 외에도 일부가 빠진 채 흩어져 있던 원효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의 지눌 연구는 조계종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종조로서의 위상, 선종은 물론 한국 불교 사상의 핵심으로서 보조사상을 자리매김하는 데 목표가 있었다. 그는 지눌이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에 입각해 선과 교를 자세히 이해했고, 특별한 근기(根機)를 위한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더함으로써 독특한 사상적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또한 지눌의 사상 저변에 있는 통불교의 원류로 원효의 사상에도 주목하였다. "원효가 화쟁사상으로 여러 교학을 회통(會通)했고, 의천은 교의 입장에서 선을 회통했으며, 지눌이 선의 입장에서 교를 일원화한 뒤 간화 경절문을 세웠다”라고 통찰하였다.
나아가 그는 조계종 정통주의와 보조 종조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조계종의 종조 문제는 보조 지눌의 역사적 위상, 조선 후기 태고법통의 전통적 권위 어느 쪽에 무게를 둘 것인지로 의견이 나뉘었다. 결국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는 한국 선종의 개조 도의, 조계종의 중천조 보조 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라는 복합적인 형태로 정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