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불갑사 ( )

불교
유적
백제 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사찰.
유적/건물
건립 시기
백제 또는 통일신라
소재지
전라남도 영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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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불갑사는 백제 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사찰이다. 불갑사가 384년 호승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설이 있지만 믿기 어렵다. 조선시대 기록에 신라 때 창건된 절로 나온다. 불갑사가 최초로 언급된 기록은 고려 말에 등장한다. 호승 마라난타 창건설은 믿을 수 없지만 백제에 인도불교적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정의
백제 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사찰.
건립 경위

불갑사에서 간행한 『백제불교의 초전법륜성지 영강 불갑사(불갑사의 연혁)』(1988)란 책에 의하면 마라난타가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마라난타는 주1 출신의 주2 승려로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라난타가 백제의 서울인 한성에 들어오기 전에 영광에 들러 불갑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마라난타의 다른 이름이 행사존자(行士尊者)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의 승려 행사(行思)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일설에는 불갑사를 행은(行恩)이 세웠다고 하는데, 이 또한 행사(行思)에서 잘못 따온 이름이다. 한편, 불갑사가 소재한 영광(靈光)이란 지명을 깨달음의 신령한 빛으로 풀이하는데 영광은 신라 때의 무령(武靈)을 고려 초에 바꾼 지명이기 때문에 백제 때 불갑사와 관련이 없다.

1608년경 수은 강항(姜沆)이 쓴 『불갑사중수권시문』에는 불갑사의 주3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법당 수리 시 ‘정원원년개조(貞元元年改造)’라는 묵서명이 나왔다는 주4을 싣고 있다. 이때 ‘정원’은 당나라 주5의 연호로 정원 원년은 785년 신라 주6 원년이다. 반계 유형원의 『 동국여지지』(1656)에도 불갑사의 창건을 신라시대라고 했다.

변천

불갑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마라난타가 384년 불갑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은 없다. 아무리 올려 잡아도 겸익이 인도에서 귀국한 526년 이후가 될 것이다. 불갑사는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불갑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믿을 만한 기록은 고려 말 문인 이달충(?~1385)이 1359년 주7 『진각국사비명』이다. 현재 불갑사에는 그 탑비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불갑사가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불갑사의 중요 국가 유산에는 영광 불갑사 대웅전, 불갑사 목조삼세불좌상, 영광 불갑사 불복장 전적, 영광 불갑사 목조사천왕상 및 복장 전적 등이 있다.

형태와 특징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에 얹혀진 주8의 형식이 인도 양식이기 때문에, 호승 출신의 마라난타가 불갑사를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런 양식은 양산 통도사 대웅전과 김제 금산사 대장전이 있다.

의의 및 평가

불갑사의 창건 설화(호승 출신의 마라난타가 불갑사를 창건했을 가능성은 적다.)나 인도에 유학 갔다 귀국한 겸익을 통해 백제 불교가 인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신증동국여지승람』

단행본

불갑사, 『불갑사의 연혁』 (1988)

논문

윤기업, 「영광 불갑사의 위상과 역사적 의의」(『한국사상과문화』 95, 2018)
조경철, 2005, 「백제 한성시기 영광불법초전설의 비판적 검토」(『향토서울』 65, 2005)
주석
주1

인도나 서역의 승려. 우리말샘

주2

중국 남북조 시대에, 진나라 멸망 후 왕족 사마예가 317년에 지금의 난징(南京)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 공제(恭帝) 때인 420년 가신(家臣) 유유(劉裕)에게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3

절을 처음 세움. 우리말샘

주4

말을 전함. 또는 그 말. 우리말샘

주5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742~805). 본명은 이괄. 그의 치세 때에 문벌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여 재정 충당을 꾀하였지만 절도사들의 반란으로 군벌 시대를 초래하였다. 또한 환관의 발호 및 관료의 붕당(朋黨) 현상도 심각하였다. 재위 기간은 779~805년이다. 우리말샘

주6

신라의 제38대 왕(?~798).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가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788년에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한편 790년에는 벽골제를 증축하여 농사에도 힘썼다. 재위 기간은 785~798년이다. 우리말샘

주7

조선 선조ㆍ인조 때의 문신(1572~1631).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 동부승지,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특히 부(賦)에 능하였으며,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우리말샘

주8

기둥에 덧대어 힘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적으로 세우는 기둥.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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