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志安, 1664~1729)은 1664년(현종 5) 6월 10일 강원도 춘천의 정(鄭)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지안은 15세 때 경기도 양평 미지산 용문사(龍門寺)에서 출가(出家)하였다. 그는 상봉 정원(霜峰淨源, 1627∼1709)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17세에는 정원의 동문인 월담 설제(月潭雪霽, 1632∼1704)를 찾아가 편양파의 주류 법맥을 이었다.
이후 지안은 평생을 교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춘천 청평사(淸平寺), 해남 대둔사(大芚寺) 등 전국 18개 이상의 산사(山寺)를 찾아다니며 대중 교화(敎化)에 힘썼다. 1690년(숙종 16)에는 부휴계의 화엄 학승인 모운 진언(慕雲震言, 1622∼1703)이 개최한 직지사(直指寺) 법회에 참가하여 모운 진언의 강석(講席)을 물려받았다.
지안의 강의는 뜻이 오묘하고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특이한 점이 많아 그의 강의에 의심을 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1681년 전라도 임자도에 표류한 중국 상선에 실린 가흥대장경본 불서의 복각본(復刻本)과 비교해 보니, 지안의 강의의 내용이 가흥대장경과 똑같이 들어맞아 모두 탄복했다고 한다.
지안의 신이한 행적을 담은 일화들이 전한다. 행장에는 지안이 고려 말의 왕사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을 꿈 속에서 만나 시를 얻은 일이 나온다. 또한 1717년 금강산에서 폭우를 만나서 두 번이나 죽을 위기를 피한 사건이 나오며, 춘천 청평사에 ‘지안이 다시 온다’라는 참언(讖言)이 전해진 내용이 있고, 마지막으로 그의 입적을 예언한 비기(祕記)가 제주도에 전해져 온 일이 기록되어 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金山寺)에서 열린 화엄대법회에는 1,400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안은 이 일로 무고를 당해 1729년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안은 7일 만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당시 그의 세수는 65세, 법랍(法臘) 51세였다. 입적 후 33년이 지난 1762년에 대둔사에 지안의 비가 세워졌다.
지안의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시집인 『환성시집(喚惺詩集)』 1권이 전한다. 『선문오종강요』는 선종 5종의 핵심 요체를 다룬 개요서이다. 이 책에서 지안은 임제종(臨濟宗), 운문종(雲門宗), 조동종(曹洞宗), 위앙종(潙仰宗), 법안종(法眼宗)의 핵심어로 각각 기용(機用), 절단(截斷), 향상(向上), 체용(體用), 유심(唯心)을 든다. 그는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삼구(三句), 삼현(三玄), 삼요(三要), 운문삼구(雲門三句)와 조동오위(曹洞五位)에 대해 설명하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덧붙였으며, 선문 5가 중 임제종이 가장 뛰어나다고 주장하였다.
지안은 입적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해남 대둔사의 제6대 종사(宗嗣)로 추숭(追崇)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