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영(粲英, 1328~1390)은 고려 말에 태고 보우(太古普愚)를 계승하고, 우왕 대에 왕사로 책봉된 선승이다.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이다. 경기도 양주시 출신이며, 아버지는 사복시 직장(司僕寺直長)을 지낸 한적(韓績)이며, 어머니는 청주 곽씨(淸州郭氏)이다.
찬영은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14세로 태고 보우(太古普愚)의 제자로 출가하여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등에 머물렀다. 이어 유점사(楡岾寺)의 수자 화상(守慈和尙)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1350년(충정왕 2)에는 승과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로 급제하였다. 대흥사(大興寺)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물러나 양주 소설산(小雪山)과 삼각산에서 3년 동안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태고 보우(太古普愚)가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여 구산선문을 통합하고자 하였을 때 시랑(侍郞)으로 참여하였고, 1359년(공민왕 8)에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이 되었다. 이후 그는 승직을 사양하고 석남사(石南寺), 월남사(月南寺), 신광사(神光寺), 운문사(雲門寺) 등에 머물렀다. 1372년(공민왕 21)에 내원당(內願堂) 감주(監主)로 임명되었고, 공민왕은 그에게 정지원명무애국일선사(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라는 호를 내렸다.
우왕은 즉위 후에 찬영을 가지사(迦智寺) 주지로 임명하고, 특별히 선교도총섭정지원명묘변무애국일도대선사(禪敎都摠攝淨智圓明妙辯無碍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더하였다. 1377년(우왕 3)에 찬영은 보개산(寶蓋山)으로 은둔하였으나, 왕명을 받아 가지사(迦智寺), 태자산(太子山)에 머물렀다. 1382년에 태고 보우가 입적하자, 1383년(우왕 9)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다음 해에 찬영은 중흥사에 태고 보우의 비를 세우고 스승의 덕행을 기렸다. 1388년에 창왕이 즉위하면서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세 번 사양하고, 흥성사(興聖寺)로 옮겨 머물렀다.
1390년(공양왕 2)에 왕이 그를 국사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나 정몽주, 성석린, 윤소종 등이 반대하였다. 공양왕은 이성계 세력의 추대로 즉위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발휘하기 위해 왕실의 행사와 의례를 시행하고, 불교 행사를 확대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자들의 불교비판론이 확산되고, 역성혁명의 정치적 명분을 위해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는 정치적 상황이 지속되면서 찬영의 국사 책봉은 좌절되었다.
이후 찬영은 억정사에 머물다가 그해 6월에 입적하였다. 공양왕이 지감국사(智鑑國師)라는 시호와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이어 1393년(태조 2)에 조선 태조가 대지국사(大智國師)라는 시호와 지감원명(智鑑圓明)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찬영의 스승인 태고 보우가 고려 말에 간화선 지상주의를 표방하였고, 찬영 자신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태고 보우의 간화선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찬영은 『농상집요(農桑輯要)』 고려판에 한자의 음과 뜻을 붙였는데, 이를 위해 그는 『광운(廣韻)』, 『옥편(玉篇)』, 『집운(集韻)』, 『운회(韻會)』, 『증운(增韻)』, 『오음집운(五音集韻)』 등 일반 음의서와 『용감수감(龍龕手鑑)』,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등 불교 음의서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찬영의 학문적 관심이 넓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4세기 선종이 원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폭넓은 분야에서 관심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