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정본농상집요』는 1273년(지원(至元) 10) 원나라의 대사농사(大司農司)에서 지은 종합적인 농서인 『농상집요』를 1372년(공민왕 21)에 합천(陜川)에서 다시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의 간행으로 고려 후기 농업 기술 발달에 따른 지방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농상집요』는 당시 중국 북방 지역의 농법을 요약 정리한 책으로서 특히 기존에 간행되었던 『제민요술(薺民要術)』을 비롯한 모든 농서(農書)를 인용하고 있고 처음 편찬된 후 농업 관련의 편람 역할을 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농상집요』는 1273년(지원(至元) 10) 원나라의 대사농사(大司農司)에서 지은 종합적인 농서(農書)로서, 당시 중국 북방 지역의 농법을 요약 정리한 책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기존에 간행되었던 『제민요술(薺民要術)』을 비롯한 모든 농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책은 처음 편찬된 후 농업에 관련된 편람 역할을 하면서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이 책이 고려에 전래된 것은 1349년(충정왕 1) 행촌(杏村) 이암(李嵒)이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구하여 온 것으로 그 판본은 1336년(지원 2)에 진주로총관부(辰州路總管府)의 큰 글자로 중간(重刊)하였던 판본을 가져온 것이다. 중국의 원대 당시의 판본은 1273년의 소자본, 맹기(孟祺)의 서문을 수록한 것과 그렇지 않은 판본으로 유통되고 있던 중 고려에 전해진 것은 중국에서 1314년에 큰 글자로 1차 간행한 후 1322년에 채문연이 서가 있는 판본을 추가로 간행하여 보급한 판본이었다.
고려에서 이 책의 간행은 이암이 죽은 지 8년 후인 1372년(공민왕 21) 합천(陜川)에서 『원조정본농상집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이 책의 간행에 관련된 인물로는 여러 사람이 있으며 지협주사(知陜州事)로 재임하고 있던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를 중심으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색(李穡), 경상도안렴사(慶尙道安廉使) 김주(金湊)와 진주목사(晋州牧使) 설장수(偰長壽), 대지국사(大智國師) 목암(木菴) 찬영(粲英) 등이 협력하여 권농의 교재로서 간행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고려 후기 농업 기술 발달에 따른 지방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후에 조선 전기의 농서를 편찬하는 데 있어서 저본(底本)으로 활용되었다.
이 책의 구성은 전체 7권을 다시 상중하의 3권 체재로 구분하고 권말에 음의(音義)와 이색과 설장수의 서후(書後)를 첨부한 것으로 현존하는 판본은 3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에서 1372년에 간행된 판본의 판면 형식은 12행 25자에 판심의 어미는 불규칙하고 그 구성은 상권에서는 전훈(典訓), 경지(耕地), 파종(播種), 중권에서는 재상(栽桑), 양잠(養蠶), 하권에서는 과채(瓜菜), 과실(果實), 죽목(竹木), 약초(藥草), 자축(孶畜), 금(禽), 세용잡사(歲用雜事) 등을 수록하고 각 권의 말미에는 음의를 붙였다. 상권에는 채문연(蔡文淵)의 서문(1322), 왕반(王磐)의 서문(1273)에 이어 권1,2가 있고 중권에는 권3, 4, 하권에는 권5, 6, 7의 내용과 맹기(孟祺)의 후서(1273), 진주로총관부(辰州路總管府)의 중간 후서(1336) 등 중국 기록에 이어 강양(江陽, 합천) 간행의 기록과 목암(木菴)의 지문, 이색의 후서(1372), 같은 해 설장수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왕조는 후기에 이르러 봉건 지배층의 수탈과 몽고의 침략과 약탈로 농업 생산이 붕괴되고 말기에 이르러 왜구의 노략질 등으로 피폐해진 농업 생산의 재건과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중국의 농업 경험이 집약된 이 책을 간행하여 적극 보급하고 활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배경에 주된 역할을 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서예에 조예가 깊어서 특히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알려졌으며, 학자로서도 명성이 있고 정치가로서도 활동한 사람으로 당시 고려말 농업 사정에 대하여 관료로서 깊은 관심을 가져 원나라에서 『농상집요』를 도입하였으며, 그의 사후 조카사위인 양진당 강시가 그 뜻을 이어 『원조정본농상집요』라는 제목으로 다시 간행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