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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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개념
불교의 조직 · 사상 · 의식 · 신앙 · 역사 · 문화 등을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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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불교의 조직 · 사상 · 의식 · 신앙 · 역사 · 문화 등을 연구하는 분야의 학문.
내용

우리 민족이 신봉하고 연구한 불교의 학문적 성과 전반을 지칭한다. 인도에서 비롯된 불교는 서역 지방과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

고구려에는 372년(소수림왕 2),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1), 신라에는 527년(법흥왕 14)에 전파되면서 불교의 방대한 경전을 전문 수행인인 승려가 중심이 되어 연구하여 왔다.

불교학은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하고 강의 설법한 내용과 주석(註釋) 및 견해 등을 기록한 저술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활동 전반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한 불교인들의 학술활동과 학문적 성과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성쇠를 보였고, 양과 질에서도 풍부하고 빈약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학 연구 관계 자료로서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옛 문헌들 속에 극히 드물게 보이고 있는 경전이나 논서(論書)의 이름 및 고승들의 자취들을 통해서 당시 불교학 경향을 부분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① 고구려의 경우에는 승랑(僧朗)이 삼론학(三論學 : 中論·百論·十二門論)을 집대성했다. 그는 양나라에 살면서 중국 불교학계에 매우 큰 기여를 하였다.

또 실법사(實法師)와 인법사(印法師)도 수나라에서 활동한 삼론학자이며, 일본에 건너가 고구려 불교문화를 전한 고승들 중에는 혜자(慧慈)·혜관(慧灌)·도등(道登) 등의 삼론학자들이 있었다. 특히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한 사정들로 미루어서 고구려에 삼론학이 적지않게 연구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고 576년(평원왕 18)경에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고 돌아왔다는 의연(義淵)에 관한 기록을 보면 ≪십지론 十地論≫·≪지도론 智度論≫·≪금강반야론 金剛般若論≫ 등의 논서 이름들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 고구려에는 그러한 논서들을 비롯한 많은 경교(經敎)의 불교학문이 연구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을 따름이다.

② 백제의 경우도 현존자료가 많지 않다. 552년(성왕 4)에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謙益)이 율전(律典)과 아비담장(阿毘曇藏)의 범어 원본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였다.

특히 율부(律部)는 72권이 번역되었고,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계율에 관한 주석서인 율소(律疏) 36권을 지어 계율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541년에 양나라로부터 ≪열반경≫ 등의 의소(義疏)를 들여 왔으며, 577년(위덕왕 24)을 전후하여 현광(玄光)은 중국에서 ≪법화경≫을 공부하고 돌아와 크게 교화하였다.

602년(무왕 3)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던 관륵(觀勒)은 삼론의 학자였으며, ≪법화경≫ 독송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무왕 때의 혜현(惠現)도 삼론을 강학하였다.

연대 미상의 의영(義榮)은 ≪약사본원경소 樂師本願經疏≫ 1권과 ≪유가론의림 瑜伽論義林≫ 5권을 지었으며, 의자왕 때 도일한 도장(道藏)은 ≪성실론소 成實論疏≫ 16권을 지었고 법상(法相)과 구사(俱舍)와 삼론에도 능한 학자였다.

백제에서는 주로 이상의 경·율·논이 강학되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경교가 연구되었을 것으로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현재 그 때의 저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

③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경우에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저술은 없고, 몇몇 고승의 저서 명목이 전해지고 있다. 진평왕 때에 대승경교(大乘經敎)를 강학하였다는 원광(圓光)은 ≪여래장경사기 如來藏經私記≫ 3권과 ≪대방등여래장경소 大方等如來藏經疏≫ 1권을 저술하였다.

585년(진평왕 7)에 중국으로 가서 602년에 귀국한 지명(智明)은 ≪사분율갈마기 四分律羯磨記≫ 1권을 남겼다. 자장(慈藏)은 ≪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 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 四分律羯磨私記≫ 1권, ≪십송률목차기 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 觀行法≫ 1권 등을 남겼다.

원승(圓勝)은 ≪범망경기 梵網經記≫ 1권, ≪사분율갈마기≫ 2권, ≪사분율목차기 四分律木叉記≫ 1권 등을 저술하였다.

삼국통일 후의 신라 전성기에는 불교학의 연구가 매우 성하였다. 그 성과로서의 저서도 많이 이루어졌다.

원효는 당시 신라에 행해지던 경·율·논의 전반에 걸쳐서, 종요(宗要)·소(疏)·요간(料簡)·요략(要略)·기(記)·초(抄) 등의 명칭으로 주석하고 논명(論明)한 것이 무려 85종 180여 권이나 된다.

그 중에서도 당나라와 신라를 통해 최초라고 할 수 있는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 3권과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대표적인 저서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그의 저술은 20여 종이 남아 전해진다.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크게 일으킨 의상(義湘)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1권과, ≪입법계품초기 入法界品抄記≫ 1권, ≪화엄십문간법관 華嚴十門看法觀≫ 1권 등 화엄 관계 저서와 ≪미타경의기 彌陀經義記≫를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법계도≫와 몇 편의 발원문과 예문(禮文) 등이 있다.

신문왕 때의 경흥(憬興)은 술찬(述贊)·소·요간·기 등으로 이름을 붙여 당시 중요한 경·율·논에 대한 주석서를 40여 종 270여 권이나 저술하였으며, 현존하는 것은 5종 11권이다.

원효·경흥과 더불어 3대 저술가라고 할 수 있는 경덕왕 때의 태현(太賢)은 주로 ≪고적기 古迹記≫라는 이름으로 경·율·논의 전반에 걸쳐 52종 1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현재 5종 15권이 전해진다.

그는 특히 유가유식(瑜伽唯識)의 대가였으므로 그 계통의 저술을 많이 남겼다. 이 밖에 통일 전성기의 고승으로 의적(義寂)은 25종 72권, 도륜(道倫)은 18종 84권, 도증(道證)은 13종, 현일(玄一)은 10종, 승장(勝莊)은 7종의 저서를 남겼다.

통일기의 불교학자들이 많이 다루고 있는 불경으로는 ≪화엄경≫·≪반야경≫·≪법화경≫·≪열반경≫·≪아미타경≫·≪미륵경≫·≪금광명경≫ 등이며, 율로서는 ≪범망경≫·≪보살계본 菩薩戒本≫·≪사분율≫, 논으로는 ≪기신론 起信論≫·≪유가론 瑜伽論≫·≪유식론 唯識論≫·≪인명론 因明論≫ 등이었다.

그러나 신라 말에는 교학연구가 침체되고, 또 선법(禪法)이 전래되어 이렇다 할 교학상의 저술을 남기지 못하고있다.

선종과 양재기복(禳災祈福: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함)의 행사불교를 중시한 탓으로 고려시대에는 학구적인 불교저술이 매우 미미하였다.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고려에는 불교학의 전공 분야로 계율·법상·열반·법성(法性)·원융(圓融)·선적(禪寂)의 여섯 학종(學宗)이 있었다고 하나, 그 학종들이 남긴 불교학 저서도 없으며 따라서 학구적인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고려 초기의 균여(均如)는 ≪화엄교분기석 華嚴敎分記釋≫ 10권, ≪수현방궤기 搜玄方軌記≫ 10권, ≪지귀장기 旨歸章記≫ 2권, ≪공목장기 孔目章記≫ 8권, ≪오십요문답기 五十要問答記≫ 4권, ≪탐현기석 探玄記釋≫ 28권, ≪삼보장기 三寶章記≫ 2권, ≪법계도기 法界圖記≫ 2권, ≪십구장기 十句章記≫ 1권, ≪입법계품초기≫ 1권 등을 저술하여 화엄학 연구에 성과를 남겼다.

또 당시의 제관(諦觀)은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를, 의통(義通)은 ≪관경소기 觀經疏記≫·≪광명현찬석 光明玄贊釋≫·≪광명구비급초 光明句備急鈔≫ 등을 남겼으나, 모두 중국에서 저술하였으며,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또한 의천(義天)은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거의가 문화사적으로나 교학연구의 자료집으로서 가치 있는 편집이다.

학구적인 연구서로서는 ≪간정성유식론단과 刊定成唯識論單科≫·≪팔사경직석 八師經直釋≫·≪소재경직석 消災經直釋≫·≪천태사교의주 天台四敎儀註≫ 등을 들 수가 있다.

고려 초·중기의 학술성과로 볼 수 있는 저자 미상의 ≪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髓錄≫은 신라 의상의 ≪법계도기≫를 연구한 총서이다.

이 밖에는 이렇다 할 교학적인 저서를 보기가 어려우므로 중·후기 불교학의 연구 경향을 알기가 어렵다. 단지 선사들의 선 관계 저서들을 볼 수가 있다.

지눌(知訥)은 ≪수심결 修心訣≫·≪진심직설 眞心直說≫·≪간화결의론 看話決疑論≫·≪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화엄론절요 華嚴論節要≫·≪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염불요문 念佛要門≫ 등을 남겨서 당시의 선학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게 하였다.

그로부터 고려 후기의 선사들은 어록·문집 등을 남기고 있을 따름이다. 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집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一然)은 ≪중편조동오위 重編曹洞五位≫·≪조정사원 祖庭事苑≫ 등의 선서(禪書)를 남겼다.

국가적으로 배척당하고 억압받았던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 교학연구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산사(山寺)에는 간경강학(看經講學)의 강원(講院)과 참선하는 선방(禪房)과 염불하는 염불당(念佛堂)이 있어서 수행을 하였으나, 학구적인 저서는 일부 고승에게 국한되고 있다.

조선 초기의 선사 기화(己和)는 ≪원각경소 圓覺經疏≫ 3권과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 2권, ≪영가집설의 永嘉集說誼≫·≪현정론 顯正論≫ 등을 남겼다.

설잠(雪岑)은 ≪법계도주 法界圖註≫·≪조동오위요해 曹洞五位要解≫·≪십현담요해 十玄談要解≫·≪법화경별찬 法華經別讚≫ 등을 남겼다.

중기의 휴정은 ≪선가귀감 禪家龜鑑≫을 지었고, 정원(淨源)은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銓集都序≫와 ≪법집별행록절요 法集別行錄節要≫의 과문(科文)을 지었으며, 추붕(秋鵬)도 ≪도서≫의 과평(科評)과 ≪절요사기 節要私記≫를 지었다.

지안(志安)은 ≪선문오종강요 禪門五宗綱要≫를 남겼고, 정혜(定慧)는 ≪도서착병 都序著柄≫·≪절요사기화족 節要私記畫足≫·≪화엄소은과 華嚴疏隱科≫ 등을 남겼다.

최눌(最訥)은 ≪화엄과도 華嚴科圖≫·≪제경회요 諸經會要≫·≪심성론 心性論≫을 남겼다. 팔관(捌關)은 1769년(영조 45)에 ≪삼문직지 三門直指≫를 편찬, 간행하였다.

유일(有一)은 ≪도서≫·≪절요≫·≪서장 書狀≫·≪선요 禪要≫·≪금강경≫·≪원각경≫·≪능엄경≫·≪현담 玄談≫·≪기신론≫ 등에 과목(科目)과 사기(私記)를 썼으며, 의첨(義沾)도 ≪화엄경≫·≪원각경≫·≪능엄경≫·≪금강경≫·≪기신론≫·≪선문염송 禪門拈頌≫·≪서장≫ 등의 사기를 지었다.

후기에 이르러 간행된 긍선(亘璇)의 ≪선문수경 禪門手鏡≫과 의순(意恂)의 ≪선문사변만어 禪門四辨漫語≫, 홍기(洪基)의 ≪선문증정록 禪門證正錄≫, 유형(有炯)의 ≪선원소류 禪源遡流≫ 및 진하(震河)의 ≪선문재정록 禪門再正錄≫ 등은 선의 논란을 크게 일으킨 선의 이론서들이다.

현대적 모든 학문의 발전 추세와 경향에 따라 불교학도 상당히 과학적으로 전공화되고 있다. 오늘의 불교학은 교리 분야(敎理分野)와 역사 분야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교리 분야(敎學)에는 인도불교의 근본교학·부파교학(部派敎學)·대승교학·반야공(般若空)사상·유가유식사상·밀교사상과 중국불교의 삼론학·천태학·법상유식학·정토교학·계율학·화엄학·진언밀교학(眞言密敎學)·선법·삼계교학(三階敎學)·비담(毘曇)·구사학(俱舍學) 등이다.

그리고 이상의 여러 교학을 한국에서 전개, 형성시킨 교학사상 등의 전공 분야로 세분된다. 불교사 분야에는 국가와 지역별 불교사·교리사상사·신앙의식사·교단사·미술사·문학사·음악사·정치·경제·사회 등 특수사들의 전공을 들 수가 있다.

현재 상당히 많은 각 전공 분야의 학자들이 학술회의 및 학구적인 논저를 통하여 활발한 연구발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정기간행의 순수 불교학 전문학술지로는 현재 학회지와 대학 부설연구소의 학술지 및 대학 안의 학회지 등이 있으며, 각 대학의 논문집이나 여러 가지의 학술지 및 연구논문집 속에 각 분야의 불교학 관계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또 전공학술성을 띤 단행 연구서도 적지않게 간행되어 있으며, 중요하고 무게 있는 자료집들도 간행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학 연구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는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비롯하여 중앙승가대학, 유명 사찰의 불교전문강원 등이 있다.

참고문헌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의천)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불교문화연구소,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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