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종 ()

목차
관련 정보
불교
단체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창립한 불교 종단.
단체
설립 시기
1097년(숙종2)
해체 시기
1424년(세종6)
설립자
의천
설립지
국청사
상위 단체
오교양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천태종(天台宗)은 고려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이 주도하여 창립한 불교 종단이다. 1097년(숙종2) 국청사가 창립되면서 의천이 국청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1101년(숙종6) 국가의 주관 아래 천태종선을 별도로 시행하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요세가 주도한 백련결사가 흥행하면서 천태종이 부흥하게 되었으며, 원 황실의 후원을 받은 묘련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은 고려 후기의 대표 종단으로 성장하였다.

목차
정의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이 창립한 불교 종단.
내용

1097년(숙종2)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은 어머니 인예태후와 고려 숙종의 도움을 받아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다. 화엄종 소속이었던 의천은 천태종을 통해 선교(禪敎)의 대립을 융화하고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사상을 높이 제창(提唱)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천태교학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려의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창종하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였다. 오월(吳越) 왕의 요청으로 고려 광종이 천태전적을 오월에 보내주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천태학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광종 때 오월로 건너간 제관(諦觀)이나 이후의 의통(義通)은 오월 지역에 천태종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의통의 법맥은 지례(知禮)-범진(梵臻)-종간(從諫)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고려 초에는 천태종이라는 교단은 없었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에 의하면, 이미 의천은 1085년(선종3) 4월 송나라로 떠나기 전에 천태종을 창립할 의지를 표명하였다고 한다. 1089년(선종6)에 고려에서는 국청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1097년(숙종2) 2월에 국청사가 완공되었다. 숙종은 그해 3월 의천을 국청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국청사에서 의천이 천태교학을 강의할 때 1,000명이 넘는 학승(學僧)들이 모여 들어 그에게 배움을 구하였다고 한다. 2년 후인 1099년 천태종 자체로 첫 승선(僧選)을 시행하였고, 1101년 국가의 주관 아래 천태종의 대선(大選)인 천태선(天台選)을 시행하여 40여 명의 승려들을 선발하였다. 고려의 천태종 승려들은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 같은 선종의 승계를 받았다.

천태종이 창립된 당시에는 선종에서 옮겨온 오문학도와 덕린(德麟), 익종(翼宗), 경란(景蘭), 연묘(連妙) 등 천태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직투문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1101년 의천이 입적한 후 오문학도들은 천태종을 떠나고 직투문도들은 칠곡 선봉사로 내려가 결집하였다. 최초의 천태종 대선에서 상상품(上上品)에 합격한 교웅(敎雄, 10761142)과 그의 제자 덕소(德素, 11071174)가 천태종의 계보를 이어갔고, 덕소의 문하에서 승지(承智)와 재사(再思) 등 1,200여 명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한때 침체되었던 천태종을 다시 중흥한 인물은 요세(了世, 1163~1245)이다. 그는 1208년(희종 4) 월생산(月生山) 약사사(藥師寺)에서 천태교학을 익히고 크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요세는 강의와 설법을 하면서, 매일 53존불(尊佛) 각각에게 12번씩 절을 하며 참회하였다. 요세는 1216년(고종 3)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로 자리를 옮겨 천태종을 중흥하는 데 힘썼으며, 1232년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열어 전통적인 법화삼매 수행을 지도하였다. 그때 이 결사(結社)에 참석한 자들은 매일 한 번씩 『법화경』을 독송하고, 준제신주(准提神呪)를 1,000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1만 번 부르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또한 요세는 천태종의 가장 중요한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를 요긴하게 간추려서 「삼대부절요(三大部節要)」를 만들어 천태교학을 널리 전파하였다. 요세의 뒤를 이은 천인(天因)천책(天頙) 등의 제자들과 그의 법손(法孫)(法孫)들은 백련사를 중심으로 천태종풍을 널리 선양(宣揚)하였다. 개성 국청사에 종단의 중심을 두었던 천태종은 요세 이후에 이르면 전라남도 강진(康津)의 백련사로 종단의 중심을 옮기며 천태종의 세력을 새롭게 확장하였다.

조선 태조는 자신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1392년에 큰 법회를 베풀었다. 그때 태조 이성계는 현견(玄見) 등 천태종의 대덕(大德) 330여 명을 법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천태종의 고승 조구(祖丘)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태조의 보호 아래 천태종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1406년(태종 6) 3월 의정부계청(議政府啓請)에는 11개 종파의 이름이 보이는데, 거기에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의 이름이 있어 천태종이 둘로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태종이 언제 두 개의 종파로 갈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두 종파는 1407년 초 조정에 의하여 다시 하나의 천태종으로 합쳐지게 된다.

그러나 1424년(세종 6)에 천태종은 또다시 조계종(曹溪宗) · 총남종(摠南宗)과 함께 선종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졌다. 당시 천태종의 마지막 고승인 판천태종사(判天台宗事) 행호(行乎)는 황폐해진 백련사를 중창하여 천태종을 중흥하고자 도모하였으나, 천태종은 다시는 중흥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
불교문화연구소 편, 『한국천태사상연구』(동국대학교 출판부, 1983)
조명기, 『고려대각국사와 천태사상』(동국문화사, 1964)

단행본

논문

김상영, 「고려전기 천태종 개창과 관련한 몇 가지 문제」(『중앙승가대학교 교수 논문집』, 1999)
이기운, 「고려 천태종의 법사종과 소자종의 성립에 관한 연구」(『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90, 2021)
최병헌,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창과 송의 천태종」(『인문논총』 47, 2002)
최병헌, 「천태종의 성립」(『한국사』 6, 1975)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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