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긴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고, 4주연(周緣)에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얕게 새긴 개석(蓋石)을 얹었다.
37행에 행마다 71자를 해서로 썼으며, 제액(題額)은 ‘천태시조대각국사비명(天台始祖大覺國師碑銘)’이며, 자경(字徑) 8.4㎝의 전서(篆書)이다.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승(僧) 인(麟)이 쓰고 전액도 하였다.
비문에는 국사가 문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예대후(仁睿大后), 휘는 석구(釋煦), 자는 의천(義天)이라는 것과 송나라 유학에서의 구법활동, 그리고 천태교(天台敎)를 확립하는 과정 및 교화, 그 밖에 국사가 남긴 유교명(遺敎銘) 등이 실려 있다.
또 비문 상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 비는 남숭산(南嵩山)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그 뒤의 문인인 지천(智遷)의 간자(刊字)를 인용하면, 이 비는 조선의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금오산(金烏山)에 송나라의 소흥원년(紹興元年) 8월에 세워졌으며, 그 이전에 오관산(五冠山: 개성 靈通寺址)에도 국사의 비가 세워졌는데(1125), 전자는 증시(贈諡: 임금이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주던 일)를 위하여 세운 것이고, 이 비는 오로지 대각국사가 천태교를 수립한 시조임을 밝히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글씨는 가로획이 가늘고 세로획이 두드러지게 굵어 당의 서호(徐浩)나 안진경(顔眞卿)의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파세(波勢)는 아직 초당(初唐)의 면모를 고수하고 있다. 필력이 주경(遒勁: 힘이 굳셈)하고 간가(間架: 짜임새)가 평정(平正)하여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보는 독특한 필체인데, 역시 인의 자가풍(自家風) 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