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통은 어린 나이에 구산원(龜山院) 석종(釋宗)의 문하에서 출가하였고, 『화엄경』과 『기신론(起信論)』을 배웠다고 한다. 그가 오월에 입국한 나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불조통기』에서는 21세인 947년(고려 정종2)에 천태산 운거원을 방문하여 덕소(德韶, 891971)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덕소는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의 제자로 훗날 광종이 사신을 보내 초청해 온 혜거(慧炬)와 동문이었다.
이후 의통은 나계원(螺溪院)의 의적(義寂, 919~987)을 찾아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종지(種智)를 배웠다. 의적은 국청사에서 수학한 후 천태 전적을 수집하며 천태종의 부흥에 힘쓴 인물이다. 오월의 충의왕 전홍숙(錢弘俶)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태 전적을 구한 데에는 의적과 덕소의 의지가 있었다. 고려와 오월이 불교를 통해 교류하던 현장에 의통이 있었던 것이다.
의통은 고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사명(四明)에 이르렀을 때 전홍숙의 아들 전유치(錢惟治)를 만났다. 그는 의통에게 제자의 예를 갖추어 심요(心要)를 묻고 보살계(菩薩戒)를 받기를 원하며 그의 귀국을 만류하였다. 968년에 고승 휘가 의통을 위해 자신의 집을 내어 전교원(傳敎院)을 개설해주었고, 전교원에 지종(智宗, 930~1018)을 불러 『대정혜론』과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게 하였다. 전교원은 훗날(982) 오월의 조정으로부터 보운원(寶雲院)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오월 조정의 지원 하에 전교원의 교세는 날로 발전하였다.
의통의 제자 가운데 사명 지례(四明知禮), 자운 준식(慈雲遵式)은 송나라 천태종을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스승인 의통은 고려 출신이지만 중국 천태종의 16대 조사로 추증되었다. 988년 10월 21일 의통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그를 화장한 뒤 사리(舍利)를 받들어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서북쪽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의통의 저서로는 『관경소기(觀經疏記)』 · 『광명현찬석(光明玄贊釋)』 등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법손(法孫)인 종효(宗曉)가 1203년에 그의 행적을 한데 묶어 『보운진조집(寶雲振祖集)』을 편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