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일하던 노파의 아들로, 어렸을 때 이름은 우조(憂助)이다. 어려서 신이한 능력이 드러나 출가하였다. 『삼국유사』에 몇 가지 신이가 전한다. 천진공이 종기가 나서 돌아가시려 하였는데, 일곱 살의 그가 병상 아래 앉자 종기가 터져 병이 나았다. 또 천진공이 동생에게 빌려준 매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밤사이 매를 찾아온 일도 있었다.
혜공은 출가 후 작은 암자에 머무르며 삼태기를 지고 취하여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부궤화상(負簣和尙)이라 불렀고, 그의 암자를 부개사(夫蓋寺)라 불렀다. 이는 무애박을 만들고 무애가를 지어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을 교화한 행동과 상통한다. 7세기 왕경에서 교화 활동을 펼친 혜공, 혜숙, 원효 같은 이들을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민중 교화승이라 부르기도 한다.
혜공의 신이는 출가 후에도 계속되었다.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 나오지 않았고, 나올 때는 벽의동자(碧衣童子)가 먼저 나왔으며, 우물에서 나와도 옷이 조금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루는 새끼줄을 가지고 영묘사(靈廟寺)에 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 남문 행랑 등에 둘러 치고 3일 후에 풀라고 하였다. 3일 만에 선덕왕이 절에 거둥하였을 때 귀신이 절을 태웠으나, 그가 새끼로 맨 곳은 타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영일군 항사사(恒沙寺)에 있었는데 원효(元曉)가 경소(經疏)를 지을 때 의심나는 것은 그에게 와서 묻고 서로 농을 하였다. 혜공과 원효가 이 절의 앞 개울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똥을 누자, 똥이 고기로 변하여 한 마리는 물결을 거슬러서 위로 올라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가는 고기를 서로 자기가 잡았던 물고기라고 희롱하였는데,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기가 진리를 찾아 나아가는 수행자를 상징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 절 이름을 오어사(吾魚寺)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평생 신이한 기적을 매우 많이 남겼으며, 죽을 때에도 공중에 떠서 입적하였다.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전생에 자신이 찬한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그를 후진(後秦) 승조(384-414?)의 후신이라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