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서산(瑞山). 호는 은암(隱庵). 시호는 정신(貞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유성윤(柳成潤)의 6세손이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 유성계(柳成桂)의 손자이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유숙(柳淑)의 아들이다.
무예에 능하여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10여 만명의 홍건적이 재차 침입해오자 왕은 안동으로 피난하였는데 그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1363년 김용(金鏞) 일파가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왕을 피난시킨 공으로 역시 2등공신이 되었다.
우왕이 즉위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가 되었고, 1376년(우왕 2) 전주도병마사(全州道兵馬使)로 있을 때 왜구를 실은 20여 척의 배가 임주(林州)에 침입해오자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과 더불어 싸워 물리쳤다.
같은 해 왜구가 또 낭산(朗山: 지금의 礪山) 등지에 침입하자 원수 유영(柳濚)과 함께 싸워 30여 명을 죽이고 우마(牛馬) 300여 마리를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우왕이 심히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렸다.
이듬해 해주와 평주에 왜구가 침입해오자 최영(崔瑩)·변안열(邊安烈)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그 뒤 왜의 기병 300여 기가 고부·태인 등지에 침입하여 관사를 불태우자 이를 추격하였으나 패퇴시키는 데 실패하여 전주를 함락당하고 말았다.
계속하여 적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리하여 헌사(憲司: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아 봉익(奉翊) 이상의 벼슬은 삭탈되어 유배되었다가 곧 석방되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