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크게 화엄학(華嚴學)을 선양하였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관광차 일본으로 갔다가 스승을 찾아 법(法)을 구하였으며, 당나라로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전해받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주(和州 : 奈良)의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대중들 속에 섞여 살았다. 그때 도다이사(東大寺)의 양변(良辯)이 화엄종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자줏빛 옷에 푸른 바지를 입은 승려가 나타나서 화엄종을 펴기 위해서는 엄지사(儼智師)를 청해다가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앞에서 개강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원흥사의 엄지법사를 찾아가 청하였더니 엄지는 자기의 깨달음이 심상만 못하고, 그가 곧 엄지사라 하면서 청하기를 권하였다. 이에 양변은 다이안사로 가서 심상을 세번이나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 소문이 대궐에까지 들려 임금이 그를 불렀다.
740년(효성왕 4) 12월 18일에 금종도량(金鐘道場)에서 『화엄경』을 강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서울의 이름있는 스승 16명과 그 지역 일대의 많은 학자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참석하였다.
개제(開題)하는 날에는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절로 행차하여 설법을 들었는데, 심상의 거리낌없는 연설과 미묘한 해석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자줏빛 구름 한 조각이 가스가산(春日山)을 덮어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기이함과 탄복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비단 1,000필을 내렸고, 태상왕의 왕후와 공경(公卿) 이하도 모두 보시하였다. 또한, 임금은 자훈(慈訓) · 경인(鏡忍) · 원증(圓證) 등 3대덕(三大德)을 복사(覆師)로 삼아서 그의 강설을 돕게 하였다. 심상은 한 해에 20권씩을 강설하여 60권 『화엄경』을 3년만에 모두 설법하였다.
이때 양변은 그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스승과 제자의 노력으로 일본에서 화엄종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저서로는 『화엄기신관행법문(華嚴起信觀行法門)』 1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