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소(義沼)는 경상도 달성(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으로 성은 이(李), 본관은 성산(星山), 이름은 의선(義宣)이다. 자는 자의(字宜), 법호(法號)는 인악(仁岳), 법명(法名)은 의첨(義沾)이며, 의소(義沼), 의침(義砧)으로도 전한다.
의소는 8세 때 『소학』을 배우면서 한 번 듣고 세 번 읽으면 곧 암송(暗誦)하여 신동으로 알려졌다. 15세에 『시전(詩傳)』 · 『서전(書傳)』 · 『주역(周易)』을 읽고 뜻을 통달하였고 문장도 뛰어나 학자로서 장래가 기대되었다.
1764년(영조 40) 달성 용연사에 가서 유학을 공부하던 의소는 간경(看經)하고 수행하는 승려들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하게 된다. 벽봉(碧峯)에게 구족계를 받고 『금강경』 · 『능엄경』 등의 경전을 배웠으며, 서악(西岳) · 추파(秋波) · 농암(聾巖) 등의 고승을 찾아가서 수학하였다.
1768년 의소는 벽봉에게 편양파의 상봉(上峯) 정원(16271709)으로부터 법을 전해받았으며, 영원정사(靈源精舍)에서 화엄(華嚴)의 종장이었던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게 『화엄경』 등을 배워 그 이치를 깨달았다. 그 뒤 비슬산 · 팔공산 · 불영산 등 영남 지역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다.
1789년(정조 13) 정조가 부친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고, 다음 해에 그 재궁(齋宮)으로 수원 용주사(龍珠寺)를 창건하였다. 용주사에 불상을 점안(點眼)할 때 의소는 증사(證師)로 뽑혀 3개월 동안 용주사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의소는 「불복장봉안문(佛腹藏奉安文)」, 「제신장문(祭神將文)」 등을 지었는데, 그의 문장에 감탄한 정조가 그에게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렸다.
1796년(정조 20)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였다. 입적 후 동화사와 용연사에 의소의 영당(影堂)이 세워졌고, 1808년(순조 8) 동화사에 비가 세워졌다.
주로 용연사, 동화사 등에서 활동했던 의소는 영남 지방의 강학(講學)을 대표하는 학승이었다. 그는 문집인 『인악집』 외에 이력 과정의 사교과(四敎科) 및 대교과의 화엄 등에 관한 강의 노트이자 주석서인 사기(私記)를 다수 남겼다. 의소는 자신이 배운 설파 상언의 『화엄청량소은과(華嚴淸凉疏隱科)』에 의거해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에 대한 사기를 썼는데, 의첨의 화엄사기는 잡화기(雜貨記)로 부른다. 그가 남긴 저서들은 영남 강학의 지침서가 되었다.
의첨은 일심(一心)이 만법의 근원이고 각각의 법마다 일심을 갖추고 있으며, 몸을 주관하는 심(心)과 리(理)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