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동화사 ( )

불교
유적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유가사(瑜伽寺), 유가동화사
유적/건물
소재지
대구광역시 동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동화사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시대 법상종 소속 사찰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사명대사가 동화사에서 의승군을 이끌었다. 18세기 전반에는 염불수행자 기성 쾌선이 머물렀고, 18세기 후반에는 화엄학의 대가였던 인악 의첨이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에는 30본산의 하나였으며 동화사 지방 학림의 스님들이 3·1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정의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심지(心地)가 창건한 사찰.
건립경위

동화사의 주1과 관련해서는 고려 후기 『삼국유사』 「심지계조(心地繼祖)」, 1727년(영조 3)에 이의현(李宜顯)이 쓴 「대웅전 중창 상량문」, 근대 『동화사 사적기(桐華寺事蹟記)』에 각각 다르게 전해온다.

먼저 『삼국유사』 「심지계조」에 따르면, 헌덕왕의 아들 심지(心地)가 15세에 주2 팔공산에서 수행하다가 진표(眞表)의 제자 영심(永深)에게 가서 주3를 얻어 팔공산으로 돌아왔다. 산신과 함께 간자를 주4 사원 터를 정하기 위해 간자를 던져 점을 치고 그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간자가 떨어진 곳은 동화사 참당(籤堂)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대웅전 중창 상량문」(1727)에 따르면, 493년(소지왕 15)에 보조화상(普照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불렀고, 이후 772년(혜공왕 8)에 헌덕왕의 아들 심지가 중창하고 동화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동화사 사적기』에 따르면, 493년(소지왕 15)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라 하였다. 그 뒤 832년(흥덕왕 7) 왕사 심지(心地)가 중창하였는데, 그 때가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위의 3가지 창건 설화 가운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소지왕 시기인 493년은 아직 신라불교가 전래되기 전이기 때문이다. 세 기록에서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 헌덕왕의 아들로 나오는 심지이다. 신라 제41대 헌덕왕이 809~825년에 주5 심지가 동화사를 창건했다면 대략 9세기 중반이 될 것이다.

법상종 사찰

『삼국유사』에 따르면, 심지가 진표로부터 불골간자를 전해받은 속리산의 영심이 과증법회(果證法會)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온몸을 던지며 참회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용맹정진 끝에 영심에게 간자를 얻었다고 한다. 「대웅전 중창 상량문」에서는 처음 동화사의 명칭이 유가사라고 하였다. ‘유가사’라는 사찰명은 법상종(法相宗)의 교리서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 나온 것이고, 진표는 우리나라에 법상종을 개창한 주6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신라시대 이래 동화사는 법상종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가사가 언제 동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298년(충렬왕 24)에 세워진 「유가동화사주지오교도승통보자국존증시홍진비명병서(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에서 ‘유가동화사’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에 교종(敎宗)의 법상종 사찰로서 동화사로 불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9세기 후반에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을 조성하고, 863년(경문왕 3)에는 왕명으로 비로암(毘盧庵) 삼층석탑석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였다. 영조(靈照)가 928년(경순왕 2)에 염불암(念佛庵)을 창건하고, 934년(경순왕 8)에 동화사를 중창하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1190년(명종 20)에 보조 주7 지눌(11581210)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눌은 선종의 승려이므로 동화사를 중창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1188년(명종 18)에 주8 45명과 함께 팔공산 거조사에서 주9를 시작하였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190년(명종 20)에는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사부대중의 동참을 호소한 바 있는데, 아마도 후대에 지눌의 명성을 빌어 동화사를 중창하였다고 기록한 것 같다. 이는 홍진국존(弘眞國尊) 혜영(惠永)과 관련된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혜영은 11세인 1238년(고종 25)에 출가하여 남백월산(南白月山) 충연(沖淵)의 제자가 되었고, 17세인 1244년(고종 31)에 왕륜사 선불장에서 승과에 합격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삼중대사가 되고 1263년(원종 4)에 수좌가 되었다. 즉 그는 법상종의 승려로서 교종의 승계를 받았던 것이다. 혜영은 1292년(충렬왕 18) 주10에 봉해져 보자(普慈)라는 주11를 받고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어 동화사의 주지를 맡았다. 1294년(충렬왕 20)에 혜영이 입적하자 동화사에 부도를 건립하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1298년(충렬왕 24)에 중창하였다. 1375년(우왕 1)에 동화사의 석가불골(釋迦佛骨)을 신효사(神孝寺)에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서사원(徐思遠)이 동화사에 머물며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였고, 사명 유정(四溟惟政)이 영남 도총섭으로서 동화사에서 승군(僧軍)을 지휘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1606년(선조 39)에 사명대사의 제자들이 중창하였고, 1677년(숙종 3)에 상숭(尙崇)이 중건하였다. 1732년(영조 8) 관허(冠虛) · 운구(雲丘) · 낙빈(洛濱) · 청월(晴月) 등이 중창하였다. 18세기 전반기에 동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승려는 기성 쾌선(16931764)이고 후반기에는 인악 의첨(17461796)이다. 기성 쾌선은 염불 수행자이고 인악 의첨은 주12의 대가였다는 점에서 18세기 동화사의 역동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에는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동화사는 30본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당시 30본사에 지정된 경상북도 사찰은 동화사를 비롯하여 은해사(銀海寺) · 고운사(孤雲寺) · 김룡사(金龍寺) · 기림사(祇林寺)이다. 현존하는 주13들은 대부분 18세기에 세워진 건물로서 대웅전을 비롯하여 연경전(蓮經殿) · 주14 · 영산전(靈山殿) · 봉서루(鳳棲樓) · 심검당(尋劍堂) · 칠성각 · 산신각 · 응향각(凝香閣) · 강생원(降生院) · 원음각(圓音閣) · 천안문(天安門) 등이 있다. 또한 부속 암자로는 금당암(金堂庵) · 비로암(毘盧庵) · 내원암(內院庵) · 부도암(浮屠庵) · 양진암(養眞庵) · 염불암(念佛庵) 등이 있다.

동화사 지방학림의 3·1 만세운동

1919년 3월 28일, 중앙 학림 학생인 윤학조(尹學祚)가 주도하고 동화사 지방 학림(지금의 승가대학) 학생 이성근(李成根) · 김문옥(金文玉) · 이보식(李普湜) · 김종만(金鍾萬) · 박창호(朴昌鎬) · 김윤섭(金潤燮) · 허선일(許善一) · 이기윤(李起胤) · 권청학(權淸學) 등이 동화사 심검당에 모여 만세 운동을 결의하였다. 3월 30일 오후 2시쯤 대구 덕산정 시장(남문 밖 시장) 장날에 3,000여 명의 군중들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 등을 나누어주고,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행진하였다. 일본 군경들은 총칼로 이들을 즉각 해산시키고 동화사 지방 학림 학생 9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징역 10개월을 선고 받고 주15에 투옥되었다.

의의 및 평가

동화사에는 통일신라시대 2점과 조선시대 11점의 문화유산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산내 암자의 통일신라시대 문화유산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傳)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유산으로 불화 11점과 「동화사 부도군」이 있고, 국가 등록 문화유산으로 「동화사 괘불도」가 있다.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유산으로는 「당간지주」, 「마애여래좌상」이 전하고, 조선시대 건축물로는 「극락전」, 「봉황문」, 「수마제전(須摩提殿)」, 「대웅전」이 있으며, 불상으로는 「목조 아미타여래삼존상」「목조 약사여래 좌상 복장전적」이 있고, 불화로는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보조국사 지눌 진영」, 「사명당유정진영」이 있다. 산내 암자의 보물로는 「비로암 삼층석탑」]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금당암 동 · 서 삼층석탑」이 있고,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전(傳)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가 전해온다.

대구광역시 유형문유산으로 지정된 불화는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 「금당 아미타극락회상도」, 「지장삼존도」, 「지장시왕도」, 「칠성도」, 「사천왕도」, 「제석도」, 「천룡도」, 「대웅전 신중도」, 「감로도」, 「인악당대사 의첨 진영」, 「죽암당대선사 선찰 진영」이다. 산내 암자의 유형문화유산은 「염불암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염불암 청석탑(靑石塔)」, 「부도암 신중탱」, 「내원암 목조보살좌상」, 「내원암 칠성도」가 있고, 문화유산 자료로 지정된 「부도암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동화사에는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주었고 영심을 거쳐 심지에게 전해졌다는 『패엽경(貝葉經)』이 전해지고 있고, 고려의 예종이 이 『패엽경』을 빌려보다가 일부를 잃어버리자 송나라에서 전해온 부처님 어금니 1개를 대신 보냈다는 불아(佛牙), 당나라에서 만든 요령(搖鈴), 유정이 영남도총섭으로 있을 때에 사용하였던 영남도총섭 인장(印章), 유정이 사용하였던 금강저(金剛杵) · 소라고동 · 관수대(灌水臺) · 별향로(別香爐) · 구룡대(九龍臺) 등이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권상로 편,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논문

한지만, 「팔공산 동화사의 가람 구성 변천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37, 대한건축학회, 2021)

인터넷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대구동구문화대전(ttp://daegudonggu.grandculture.net/daegudonggu)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주석
주1

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듦. 우리말샘

주2

집을 떠나가다. 우리말샘

주3

부처님 뼈로 만든 간자

주4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시다. 우리말샘

주5

임금의 자리에 있다. 우리말샘

주6

어떤 학파를 처음 세운 사람. 우리말샘

주7

고려 신종 때의 승려(1158~1210). 속성은 정(鄭). 이름은 지눌(知訥).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선ㆍ교 양종(兩宗)이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하여, 그 전의 구산선문을 조계종으로 통합하였다. 저서에 ≪진심직설(眞心直說)≫, ≪수심결(修心訣)≫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8

함께 도를 닦는 벗. 우리말샘

주9

고려 무신 정권기에, 지눌이 수선사를 중심으로 일으킨 불교계의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계가 세속화된 것에 대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하였으며,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우리말샘

주10

고려ㆍ조선 전기의 법계(法階) 가운데 하나. 법계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으로, 고려 말에 국사(國師)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1

승려의 호. 우리말샘

주12

화엄종의 교의(敎義)를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

주13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4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 우리말샘

주15

‘교도소’의 전 용어. 우리말샘

집필자
이종수(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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