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표(眞表)의 성은 정(井) 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진내말(眞乃末), 어머니의 이름은 길보랑(吉寶娘)이다. 그런데 정은 어머니의 성이고 아버지의 성은 진(眞)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는데, 이는 진표가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또한 그가 완산주(현재의 전주시 및 그 주변 지역) 출신의 백제 유민이어서 왕경과 먼 곳으로만 대중 교화를 다녔다는 해석도 있다.
진표는 금산사(金山寺)에서 출가하여 순제(順濟)에게 『점찰선악업보경』, 『공양차제법』 등을 전수받았다.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3년여 동안 참회하며 수행하여 지장보살(地藏菩薩)로부터 계를 받았으며, 영산사로 자리를 옮겨 더욱 정진하여 미륵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수행을 마친 진표는 금산사를 중창(重創)하였다. 그는 금산사 금당에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미륵(彌勒)이 속세에 내려와 계를 주는 모습을 금당의 벽에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매년 단을 설치하여 대중을 교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진표는 불법의 교화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 현재의 강릉 지역)에 이르렀다.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그를 물 속으로 인도하였다. 이에 진표는 물고기와 자라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그들에게도 계를 주었다. 이 말을 들은 경덕왕이 진표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보살계를 받고 곡식 7만 7천 섬을 보시(布施)하였다. 황후와 궁녀들도 모두 진표에게 계품을 받았고 비단 5백 단과 황금 50냥을 보시하였다. 진표는 이를 모두 받아서 여러 산에 나누어 주며 불사(佛事)를 널리 일으켰다. 진표가 물고기에게 계를 주던 곳인 금강산 발연사에는 지금도 골석(骨石)이 남아 있다. 그러나 경덕왕이 진표를 궁으로 불러들여 조 7만 7천 석을 시주하고 보살계를 받았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와 관련해 의견이 나뉜다. 한편 진표는 말년에 아버지를 발연사로 모셔서 봉양하며 그곳에서 계속 수도 정진하였다. 이후 진표는 발연사 동쪽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앉아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진표는 속리산, 명주, 개골산 등지에서 대중을 교화하고, 미륵신앙을 통해 계법(戒法)을 받아 불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개골산에서 발연사를 창건한 진표는 발연사에서 189개의 간자를 이용해 점을 치는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기도 하였다.
진표의 전공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진표가 유식 승려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진표가 강조한 것이 미륵신앙이었으며, 팔 · 구간자를 신훈종자(新薰種子) · 본유종자(本有種子)라는 유식학 용어로 설명하였기에 내려진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진표가 율사(律師)였다는 것이다. 이는 진표가 미륵신앙과 점찰법회를 통해 계법을 강조하였고, 팔 · 구간자를 신득묘계(新得妙戒), 증득구계(增得具戒)라 해석하였다는 점, 『송고승전』에서 그의 전기를 명률(明律)편에 수록하였다는 점에 근거를 둔 것이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의 신라 불교계가 학문 불교 중심이었던 데 비해 진표는 점찰법과 참회행을 실천함으로써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고 평가된다.
진표로부터 법을 전해받은 제자로 영심(永深), 보종(寶宗), 신방(信芳), 체진(體珍), 진해(珍海), 진선(眞善), 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산문(山門)의 조사가 되었다. 진표의 법을 직접 전수받은 영심은 속리산에 길상사(吉祥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점찰법회를 열었다. 또한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心地)는 영심이 점찰법회를 연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진표의 점찰 간자를 전수받았다. 심지는 이후 동화사를 세우고 그 간자를 첨당에 두었다고 한다. 진표의 법이 속리산의 영심을 거쳐 동화사의 심지에게 계승되었다고 하여, 금산사, 속리사, 동화사를 진표계 사찰이라 한다.
한편 석충(釋忠)을 통해 진표의 가사와 계간자(戒簡子) 189개가 고려 태조에게 전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