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신라 신문왕은 대왕암(大王巖)에 다녀오던 길에 이 절의 서쪽 계곡에서 점심을 들었으며, 고려 말의 각유(覺猷)는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 그 뒤 1578년(선조 11)에 축선(竺禪)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부윤 김광묵(金光默)이 사재를 희사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화재로 113칸의 당우가 재가 되었으나, 이듬해 봄에 사찰의 승려들이 부윤 송우화(宋迂和) 등의 시주를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복원하였다.
그 뒤 1878년(고종 15)의 중수를 거쳐 1905년에는 혜훈(慧訓)이 다시 중수하였다. 31본산시대에는 월성군 일대를 관장하였으나, 현재는 불국사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正光如來舍利閣)인 삼층전(三層殿)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鎭南樓)가 있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응진전(應眞殿), 앞쪽에 진남루가 사각의 성지를 이루고 있고, 뜰에는 삼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조금 떨어져 명부전 · 삼성각 · 관음전 · 산신각 · 주지실 · 종무소 · 요사채 · 산문(山門) · 창고 등이 있으며, 특히 대방(大房)은 2동이 모두 중후하다. 그 밖에 김시습의 사당이 있다.
이들 당우 중에서 대적광전은 절의 본당으로 내부에는 전단토상(栴檀土像)의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중원(中原)의 장인이 조성하였다 하며, 불상 조성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1986년 9월에 가운데 주존불의 복장에서 『대반야경』 등 금 · 은 사경 14권과 조선시대에 만든 불경,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등이 발견되었다.
또, 약사전에는 약사삼존상과 사천왕상, 사라수왕(沙羅樹王)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탱화는 기림사 창건의 연기설화를 보여 주는 특이한 불화로서 근래 이를 모사하여 다시 그렸다. 이 밖에도 응진전 안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1965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과 목탑지(木塔址) · 석조치미(石造치尾) · 문적(文籍)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석조치미는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화문(花紋) 장식이 있으며, 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 문적 중에는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 『부호장생생가(府戶長生生家)』 등이 있다.
이들은 경상도와 경주의 행정에 관한 것과 행정관에 대한 인적사항, 신라 이후의 지방제도의 변혁 등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들이다. 또, 이 절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어필도 보관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석비 모양의 나무에 사적을 기록한 목비가 전한다.
이 절에는 원래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였다고 한다. 그 중 장군수(將軍水)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나한전 앞쪽 탑 자리에도 샘이 있었다고 하나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또 하나는 절 입구에 있었으나 최근 도로확장 때 매몰되었으며, 현재는 큰 방 옆과 아랫마을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절에는 또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한방서에도 그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