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신앙 ()

불교
개념
관세음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 보살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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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이다. 보살신앙이라고도 한다.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하여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 하는 신앙형태이다. 거의 모든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의 공통점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현세이익 신앙으로서 대중들에게 크게 호응받아 삼국시대부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당시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이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데 강화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가 대표적인 기도처이다.

정의
관세음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 보살신앙.
개설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하여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 하는 신앙형태이다. 관세음보살은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 관세음자재보살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 부른다. 일반 보살이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지는 데 대하여, 관음보살은 특히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다. 이 보살에 대해서는 방대한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만큼 널리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의 관음신앙은 주로 『화엄경』 · 『법화경』 · 『아미타경』 ·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남쪽 바닷가 광명산(光明山)에 머물면서 대자비경(大慈悲經)을 연설하여 널리 중생을 일깨워 제도하고 있다. 대비법문(大悲法門)과 광명의 행을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성숙하게 하며, 항상 모든 부처님 처소에 머물면서 사섭법(四攝法)으로 중생을 받아들여 제도한다. 또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어디에서나 중생과 같은 몸을 나타내어 감싸고 제도한다. 그의 서원은 오직 일체중생을 섭취함[攝取一切衆生]에 있다. 이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험한 길의 공포, 어리석음의 공포, 얽매임의 공포, 죽음의 공포와 빈궁의 공포, 살해의 공포, 악도(惡道)의 공포, 윤회의 공포 등 모든 공포를 떠나게 한다.

또 『법화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큰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모든 악귀도 괴롭힐 수 없다. 칼과 몽둥이는 부러지고 수갑과 항쇄 · 족쇄는 끊어지고 깨어진다. 또,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여의게 하며, 아들이나 딸을 바라는 이는 뜻에 따라 자식을 얻게 한다. 그리고 방편의 힘으로 33가지 몸으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아미타경』에서는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補處)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받들어 중생을 보살피고 도와줄 뿐 아니라, 극락정토왕생하는 자들을 인도하는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능엄경』의 경우, 관음의 현세이익과 중생구제의 내용은 『법화경』의 설과 거의 같다. 그러나 현재 우리 나라에서 관세음보살을 원통교주(圓通敎主)라 칭하고 33 응신(應身)이라 표현하는 것은 『법화경』이 아닌 『능엄경』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경전에 나타나 있는 관세음보살의 공통점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절대적 자비심인 무연대비(無緣大悲)를 중생에게 베풀어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권능을 실행하는 힘이 관세음보살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행한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송하고, 항상 마음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예배하면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고난이나 재액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칭념하면 반드시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인데, 그 칭념을 통해서 관세음보살과 중생은 일체감을 형성하고, 하나가 된 세계에서 자비로운 원력(願力)이 작용하여 소원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종류로는 성관음(聖觀音) · 천수관음(千手觀音)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 마두관음(馬頭觀音) · 준제관음(准提觀音) 등으로 분류되는 육관음과 이에 불공견색(不空羂索)을 더하여 칠관음이라 하며, 백의(白衣) · 엽의(葉衣) · 다라(多羅) · 대세지(大勢至) 등의 각종 관음을 더하여 32관음 · 33관음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성관음은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普門示顯)의 변화신(變化身)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관음신앙사를 통해서 볼 때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십일면관음과 양류관음(楊柳觀音) · 천수관음이다.

십일면관음

11개의 얼굴을 가진 관세음보살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관세음보살의 신앙과 함께 이 보살의 조상이 유행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석굴암의 조각상을 들 수 있다. 『십일면관음신주경(十一面觀音神呪經)』에 의하면, 11면이란 본얼굴을 제외하고 머리 부분에 부가된 11가지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경에는 머리 부분 전면에 3면이 있고, 그 좌우에 각각 3면, 그리고 후면에 1면, 정상에 1면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석굴암 관음상처럼 부조로 나타낼 때는 전면에 화불(化佛) 1면, 좌우에 각 3면, 정상에 3면, 그 바로 뒤에 1면을 표현하게 되는데, 이는 부조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 11면은 관세음보살의 다양한 기능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앞의 3면은 자상(慈相)으로서, 선한 중생을 보고 자심(慈心)을 일으켜 이를 찬양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의 3면은 진상(瞋相)으로서 악한 중생을 보고 비심(悲心)을 일으켜서 고통에서 구하려 함을 나타낸 것이다.

오른쪽의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으로서 정업(淨業)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는 더욱 정진하도록 권장함을 나타낸 것이다. 뒤의 1면은 대폭소상(大暴笑相)으로서 착하고 악한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대도량을 보이는 것이다. 정상의 불면(佛面)은 대승근기(大乘根機)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최상의 진리를 설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 11면을 본얼굴과 합하면 12면이 된다. 이 12면 중 11면은 방편을, 본 얼굴은 진실을 상징하며, 11면은 중생의 교화를 위한 행위와 관련이 있고 본얼굴은 불변의 지혜를 상징하고 있다. 즉, 선한 중생을 교화할 때는 자상을 쓰고, 악한 중생을 교화할 때는 진상을 쓰며, 선악이 뒤섞인 중생들을 교화할 때는 대폭소상을, 정업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백아상출상으로써 한다.

그러나 이 사바세계에는 선한 중생이 적고 악한 중생이 많으므로, 먼저 진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조복(調伏)하여 선심(善心)을 일으키게 한 뒤 자상으로써 그들을 교화한다. 그리고 한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도 정해진 일정한 상이 없다. 때로는 11면을 다 드러낼 때도 있고 1면만을 드러낼 때도 있다. 또, 불면은 1면, 자상과 진상과 백아상출상을 각각 3면, 폭소상을 1면으로 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불면이 하나인 까닭은 과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상이 3면인 까닭은 ①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이고, ② 복은 있지만 지혜가 없는 중생에게 지혜와 신통력을 갖추게 하려는 것이며, ③ 지혜는 있지만 통달하지 못한 중생에게 지혜와 신통력을 갖추게 하려는 것이다.

진상이 3면으로 되어 있는 것은 ① 고통스러운 과보를 떠나려는 욕심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낳는 행위에 빠진 자를 보고 노하는 것이고, ② 즐거움의 과보를 받고자 하지만 즐거움의 원인이 되는 선행을 닦을 줄 모르는 자를 보고 노하는 것이며, ③ 적정(寂靜)한 이치를 구하려 하면서도 도리어 산란한 경계에 집착하고 있는 자를 보고 노하는 것이다.

백아상출상이 3면인 것은 몸과 마음과 뜻의 삼업(三業)으로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자의 청정함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대폭소상은 선악이 뒤범벅된 뭇 중생들을 통틀어 비웃는 까닭에, 1면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단계는 자비의 등급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즉 불교를 가까이 하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자비, 그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설법,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크나큰 자비의 단계를 보여 준다.

우리 나라에 전래되는 십일면관음의 설화 중에는 신라의 국사 경흥(憬興)의 병을 고친 이야기가 널리 전승되고 있다. 삼랑사(三郎寺)에 머물러 있던 경흥은 갑자기 병이 들어 여러 달이 경과하였다. 하루는 여승이 나타나서 “경흥의 병이 근심으로 인해서 생긴 것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이라 하고, 열한 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춤을 추었다. 그 변하는 모습이 너무나 기괴하여 턱이 떨어질 지경으로 웃고 나자 경흥의 병은 나았다고 한다. 이 여승이 십일면관음의 화신이었다.

양류관음

버드나무 가지를 든 관세음보살로서 33응신 중 하나이다. 관세음보살이 중생의 소원을 좇아 이루게 하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에 쓸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양류관음이라 하였다. 이 관음은 6세기 전기에 번역된 『다라니집경(陀羅尼集經)』에서 최초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바다 위에 떠 있는 연꽃모양의 대좌 위에 큰 원형 광배(光背)를 지고 서 있는 모습으로 많이 묘사된다.

흩날리는 옷자락에 두 손에는 각각 감로병과 버드나무 가지를 쥐고 발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선재동자(善財童子, 일명 南詢童子)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양류관음이 남순동자와 함께 묘사되어 있어서 민간에서는 남순동자를 관음이 점지하는 아들로 착각하고, 흔히 아들을 기원할 때 이 관음에게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남순동자는 보타락가산에서 관세음보살의 대비법문(大悲法門)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 관음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에는 백의양류관음이라고 부른다. 백의양류관음으로 유명한 작품은 15세기에 그려진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벽화해인사의 양류관음도가 특히 유명하다.

천수관음

27개의 얼굴과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세음보살로서 천수천안관세음보살 또는 대비관음이라고도 한다. 육관음 중 두번째 관음이며, 온몸이 황금색이다. 그러나 조형 또는 그림에서는 천 개의 손, 천 개의 눈을 묘사하기 어려우므로, 줄여서 두 손을 중심으로 양쪽에 각각 20개의 손을 묘사하고 손바닥마다 한 개의 눈을 나타낸다.

이 40개의 손은 한 손마다 각각 25종류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25의 천수가 되고, 따라서 눈도 천안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큰 작용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특히 지옥의 고통을 해탈하게 하여 모든 소원을 성취시킨다고 한다. 천수관음은 654년에 한역된 『다라니집경』에서 나타나는데, 여러 관음들 중에서 가장 힘이 있는 수제자로 꼽히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8세기경부터 천수관음이 널리 신앙되어 천수보살의 불화가 많이 그려졌다. 특히, 경주 분황사(芬皇寺)의 천수관음도는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천수관음에 대한 신앙은 『천수경』의 보급과 함께 더욱 보편화되었고, 천수주(千手呪)의 영험과 함께 그 신앙이 오늘날에까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金渭錫」]

관음신앙의 역사

백제의 관음신앙

우리 나라에 관음신앙이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뿌리를 내린 것은 6세기 말경의 삼국시대로 보인다.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그 뒤 7세기 초에 조성된 백제의 관음보살상은 현재까지 적지 않은 수가 전하고 있다.

또, 제나라 육과(陸果)의 『관세음응험기』에 의하면, 백제 승려 발정(發正)이 502∼519년 사이에 중국으로 유학가서 30여 년을 머무르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월주지방(越州地方)의 관음도량을 참배하였다고 한다. 일본측 사료에도 595년 백제의 공장(工匠)을 시켜 관음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과 백제 사문 일라(日羅)가 583년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쇼토쿠(聖德)태자와 관세음보살에 관해서 문답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 백제사의 본존이 관음상인 것도 백제에 관음신앙이 성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관음신앙의 중심경전이 『법화경』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현광(玄光)이 진나라의 혜사(慧思)에게서 『법화경』을 배우고 법화삼매를 증득하였다는 것과 무왕 때의 혜관(慧觀)이 『법화경』을 독송하였다는 것 등은 관음신앙의 유포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임을 살필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고구려로 유학온 일본 승 행선(行善)이 고구려에서 관음보살을 염송하였다는 것이 일본의 기록에 나타나고 있을 뿐 그 밖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의 관음신앙

신라의 경우에는 『삼국유사』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소판 김무림은 관음상 천 부를 조성하고 아들 얻기를 기원하여 자장(慈藏)을 낳았다. 신라불국토설의 확립에 지대한 구실을 한 자장의 탄생설화에 관음신앙이 얽혀 있다는 점은 관음신앙이 불국토사상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에 크게 관음신앙을 확산시킨 고승은 의상(義湘)이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동해의 관음굴로 가서 「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을 짓고 관음기도를 했다. 발원문은 “세세생생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서 귀명(歸命)하되,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이마 위에 이고 계심과 같이 관음대성을 이마 위에 모시고 영원한 본사(本師)로 삼겠다.”는 신앙고백과, 일체중생이 관음의 이름을 생각하여 함께 원통삼매(圓通三昧)에 들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요지로 삼고 있다.

기도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속에 띄웠더니 천룡(天龍) 등 8부신(八部神)이 관음굴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굴 속에서 공중을 향해 예배하자 수정 염주 하나가 손에 쥐어졌고, 동해용으로부터 여의주 한 알을 받았지만 관음의 진신은 친견할 수 없었다. 다시 7일 동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 정진한 뒤 관음진신을 친견하게 되었다. “쌍죽(雙竹)이 나는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관음의 지시에 따라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친견한 진신의 모습과 같은 관음상과 수정 염주, 여의주를 불전에 모신 뒤 떠나갔다.

뒤에 원효(元曉)도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낙산사를 찾았는데, 도중에 원효는 벼를 베고 있는 흰 옷 입은 여자를 보았다.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벼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희롱 섞인 대답을 했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는데, 속옷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먹을 물을 청하자 여인은 핏빛 어린 물을 떠서 주었다. 그 물을 더럽게 여긴 원효는 냇물을 다시 떠서 마셨는데, 소나무에 앉았던 파랑새가 “ 제호(醍醐)를 싫다고 하는 화상, 제호를 싫다고 하는 화상”이라 하면서 조롱섞인 노래를 불렀다. 잠시 뒤 여자와 새는 사라지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는 관음상 밑의 냇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짚신 한 짝이 있음을 발견한 뒤, 전에 만났던 여자가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후회와 함께 관음굴로 들어가서 진신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 원효는 남해를 면(面)한 현재의 금산(錦山)이 관세음보살의 수월도량(水月道場)인 동시에 『화엄경』 보광전회(普光殿會)의 관음회상(觀音會上)임을 확신하고 이곳에서 기도를 올려 관음진신을 친견한 뒤, 683년에 절을 짓고 보광사라 하였다. 이 절은 현재 보리암(菩提庵)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우리 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이다.

신라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영험담은 조신(調信)의 설화이다. 조신은 서라벌 세규사(世逵寺)에 속하여 있는 명주(溟州 : 강릉) 장사(莊舍)의 관리인이 되었다. 이곳에서 고을 태수의 딸을 보고 애정을 느낀 조신은 애타는 마음으로 영험 있는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낭자와 부부연을 맺게 하여줄 것을 지성껏 빌었으나, 그녀는 얼마 뒤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조신은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은 관음보살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관음상 밑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문득 낭자가 기쁜 얼굴빛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일찍이 조신을 사모하였으나 부모의 명으로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이제 그와 부부가 되고자 함을 고백하였다. 그 뒤 40년을 함께 살아 다섯 자녀를 두었지만, 가난 때문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10년 동안 거지생활을 하다가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굶주림에 지친 열다섯 살의 큰아이가 죽었다. 길가에 묻은 뒤, 우곡현에 이르러 초가를 짓고 살았지만, 그들 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고 굶주려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열살 된 딸아이가 얻어오는 음식으로 연명하였지만, 그 딸도 마을의 개에게 물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울면서 옛 추억과 50년의 인연, 현실의 고통 등을 이야기하고, 부부는 각기 아이 둘씩을 데리고 헤어져 살자고 다짐하였다. 막 헤어져서 길을 떠나려 할 때 꿈을 깨었다. 아침이 되니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흰색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한평생 신고를 겪은 것처럼 세상사에 뜻이 없어졌고 탐욕의 마음도 없어졌다.

이 설화에는 조신의 갈애(渴愛)를 꿈으로 풀어서, 인생이 긴 꿈임을 깨우친 것으로 신라 불교신앙의 특징을 뚜렷이 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단순한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정법(正法)에 근거를 둔 관세음보살의 참된 자비를 신라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의 관음신앙

고려 초기에는 금강산 보덕굴에서 관음진신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강화보문사(普門寺)서해의 대표적인 관음기도처로 만들었다. 회정은 그곳의 굴에 봉안되어 있던 불상을 살펴보았다.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이고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 나한상과 송자관음(送子觀音)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가운데 3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 모시게 한 다음 낙가산 보문사라 부르게 하였다. 이 송자관음에는 자식을 원하는 사람의 소망을 이루게 하는 신묘한 영험담이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1185년(명종 15)에 병마사 유자량(庾資諒)이 낙산사 관음굴 앞에서 분향, 배례하자, 청조(靑鳥)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갓 위에 떨어뜨린 고사가 전래되고 있는데, 지금도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지성으로 예배하면 청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고려시대의 관음신앙에서 주목되는 것은 충숙왕 때의 승려 요원(了圓)이 저술한 『법화영험전』이다. 수록된 100여 편의 영험설화 중 3편만이 신라와 고려의 영험담이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에 관한 것이지만, 이 영험전의 편찬은 당시의 관음신앙이 생활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례가 된다.

이 영험전은 조선시대에도 보성 개흥사(開興寺), 고창 문수사(文殊寺), 안변 석왕사(釋王寺) 등의 사찰에서 재판되었는데, 이는 일반인의 생활 속에 관음신앙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관음신앙은 또한 대비원(大悲院) · 보통원(普通院) · 제위보(濟危寶) 등 구호사업기관 운영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조선의 관음신앙

이성계는 왕이 되기 전에 큰 뜻을 품고 팔도의 명승지를 다니면서 기도를 올렸는데, 남해의 보광사에서 백일관음기도를 드린 뒤 꿈에 관세음보살로부터 금척(金尺)을 하사받았다. 등극한 뒤 태조는 불은(佛恩)에 감사하는 뜻에서 보광산을 금색 비단으로 둘러싸려 하였으나, 비단의 양이 엄청나고 오래지 않아서 썩게 된다는 신하의 말에 따라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꾸어서 천만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비단산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660년에는 이 절을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보리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이곳에서 관음기도를 지성으로 하면 반드시 올바른 깨달음인 보리를 성취할 수 있다는 데서 기인되었다. 이 보리암에도 수많은 영험담이 전래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임진왜란이순신(李舜臣)을 도와서 대승을 거두게 했던 삼련(三蓮) 비구니에 얽힌 설화이다.

삼련은 묘련(妙蓮) · 보련(寶蓮) · 법련(法蓮) 등 세 비구니의 이름이다. 전라도 광양에 살았던 황유초(黃維肖)에게는 선옥(仙玉)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출가하여 보련이 되었고, 선옥의 유모는 묘련, 선옥의 몸종은 법련이 되었으며, 그들의 스승은 지월(指月)이었다. 어느 날 이들은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관세음보살의 신력(神力)과 가피를 입지 않으면 안되리라.’고 생각하여 남해 보리암을 찾았다. 그곳에서 1,000일을 관음기도를 하다가 어느 날 불상좌대 밑에 있는 고문서를 발견하였다. 그 문서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연화도인(蓮花道人)을 모시고 십년간을 이곳에서 관음성호(觀音聖號)를 부르며 공부하여, 마침내 관음대성의 자비롭고 미묘한 성상(聖相)을 친견하였다. 기쁨과 감격에 넘치어 세세생생 이곳에 와서 연화도인을 모시고 공부하기를 맹세하였다. 정덕 무인구월(正德戊寅九月) 연화도인 지월의 제자 성운(性雲) · 성련(性蓮) · 성월(性月) 삼가 기록하다”.

이 글에 적힌 연화도인은 현세의 은사 지월이고, 성운은 묘련, 성련은 보련, 성월은 법련으로 화현한 것이다. 세 비구니는 더욱 신심을 굳혀서 정진하고 천일의 정진을 회향하여 자재한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손자병법을 익히고 해산열도(海山列島)의 지세와 해류를 살피는 한편, 거북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뚜껑을 씌운 배를 만들어 타고 이순신과 함께 군사전략을 숙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련은 이순신의 막하에서 참모 겸 지휘자의 구실을 하여 싸움마다 대승을 올리게 하였고, 다른 두 비구니는 뚜껑 배를 타고 왜적을 섬멸하였다. 뒤에 조정에서는 보련에게 자운선의장군(紫雲宣義將軍)이라는 직함을 내렸다고 한다.

또, 조선 중기의 이창해(李蒼海)는 제주 목사의 부임을 위해서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태풍을 만나서 일본의 지마도(志摩島)에 이르러 40여 년을 살았는데, 어머니와 동생의 관음기도 덕분에 풍랑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동생과 해후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가 제주도로 떠나던 날 어머니는 낙산사 관음상 앞에서 관음의 대비주(大悲呪)를 외우며 기도하였고, 매년 풍랑을 만났던 날이면 명복을 기리면서 관음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 김포에는 판서 벼슬에까지 올랐던 심씨가 살고 있었다. 나이 육순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살다가 아내까지 사별하게 되자 그 고적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는 보문사로 가서 지성을 다하여 관음기도를 올리면서 아내를 맞게 하고 아들을 점지하여 줄 것을 축원하였다. 심판서가 회향하던 날 꿈에 관음보살이 나타나서 배필이 될 여자를 만나게 해주었고, 이들은 아들을 낳아서 단란하게 살다가 해로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수많은 고승들은 관음기도를 즐겨 행하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는데, 특히 천수대비주를 통한 기도가 널리 성행하였다.

관음성지(觀音聖地)

관세음보살을 통불교적으로 신앙하고 있는 우리 나라에는 3대 관음성지인 낙산사 · 보리암 · 보문사 외에도 숱한 관음영험도량이 산재되어 있다. 특히, 금강산에 자리잡은 보덕굴(普德窟)과 설악산오세암(五歲庵), 충청남도 논산관촉사(灌燭寺), 성덕산 관음사 등은 모두 특이한 이적을 보였던 관음성지이다.

또한, 서울 근교에도 예로부터 관음의 영험도량이 있었다. 동쪽에는 창신동의 안양암(安養庵), 서쪽에는 옥천암(玉泉庵) 해수관음이 있으며, 남쪽에는 관악산 삼막사(三幕寺)가 있다. 이 세 곳은 오늘날에도 기도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들 관음도량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명산대천에는 수많은 관음연기와 함께 많은 관음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다.

금강산 보덕굴은 우리 나라 관음신앙의 홍포(弘布)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영험처로서 관음의 화신인 보덕각시가 출현하였던 곳이고, 고구려의 화상 보덕(普德)이 관음의 진신을 친견한 도량이며, 고려 의종 때의 고승인 회정이 천수주력(千手呪力)으로 기도하여 관음의 원통삼매를 성취한 영지이기도 하다.

설악산의 오세암은 조선 초기에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로 생각하는 다섯 살 어린아이가 겨우내 혼자서 암자에 머물러 있었지만, 관음이 어머니처럼 보살펴주어서 무사히 생명을 건졌을 뿐 아니라 도통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용문산 상원사(上院寺)세조에게 백의관음의 모습을 나타내어 세조로 하여금 선정을 베풀도록 회개시킨 곳이며, 은진미륵의 관음상에서는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온몸에서 땀이 흐른다고 한다.

현재 우리 나라의 주요 사찰은 대부분 원통전 또는 관음전이라는 전각을 별도로 건립하고, 그 속에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보통 관세음보살상은 왼손에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들고 오른손에 감로병을 들고 있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상징한다. 그 꽃이 활짝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成佛)하였다는 것을 뜻하나, 현재의 꽃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감로병에는 감로수가 들어 있는데, 이 감로수는 불사(不死)를 뜻한다. 영원히 죽음이 없는 불사의 물로써 중생의 열뇌(熱惱)를 깨끗이 씻어주고 사악한 기운을 서기(瑞氣)로 바꾼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관음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처는 아미타불이다. 관음은 아미타불을 본사(本師)로 삼고 항상 모신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조형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원통전의 후불 탱화로서 주로 아미타삼존탱화를 모시게 되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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