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1064년(문종 18)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임진보통원(臨津普通院)에서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음식을 베풀었고, 1071년 12월에는 현덕궁(玄德宮)에서 반출한 500석의 쌀을 가지고 서보통원(西普通院)에서 영세민을 위하여 식사를 제공하였으며, 1101년(숙종 6)에는 임진현 보통원에서 4월부터 7월까지 3개월 동안에 걸쳐 무료로 나그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는 기사가 『고려사』 식화지(食貨志)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고려 후기 사료부터 등장하는 서보통사(西普通寺)를 서보통원으로 보기도 한다. 『보한집(補閑集)』에는 최우가 보제사, 광명사, 서보통사에서 담선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이규보가 지은 글이 『동국이상국집』에 전하고 있다. 이규보의 글에서 보제사, 광명사와 함께 서보통사를 3대선우(三大禪宇)라 칭하고 있어 서보통사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후기 문집과 달리 『고려사』에는 ‘서보통’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서보통원은 개경성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 후기 개경을 지키는 군대가 진을 치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충렬왕이나 충선왕비, 명나라 사신 등을 맞이하거나 주2 장소가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충렬왕의 장례를 마친 뒤 석복도량을 서보통원에서 열었고, 공민왕 때는 신돈이 관료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보통원에서의 주3에 참여하기도 했고, 우왕 때에는 이곳에 탑을 세우기도 하는 등 고려 후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었다.
개성주4 인근에서 운영된 보통원의 위치와 갯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임진현 보통원은 임진강 부근에 세워진 것이고, 이와는 달리 서보통원도 있었으며, 기록에는 없지만 서보통원이 있으니 동보통원도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나그네나 영세민을 위하여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였던 보통원이 셋이 있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통원이 임진강과 예성강의 동서에 있었고, 임진보통원이 동보통원이라고 하여 보통원이 두 개 있었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 이 가운데 구체적인 위치가 기록된 것은 서보통원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개성 영평문 밖에 있다고 하였다. 개성 서보통원은 1574년(선조 7) 기록에도 보이고 있어 조선 전기까지도 개성 지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한 원(院)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에는 개성부 외에도 여러 지역에 보통원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래로 전국 각지에 보통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조성되었던 보통원의 기원은 당나라의 오대산(五臺山)에 설치되었던 보통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주5인 오대산을 찾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돕고 주6의 불편을 없애주려고 산중턱에 이르는 동쪽과 서쪽의 양쪽 길에 반나절 거리마다 보통원을 설치하여 무료 숙박소 또는 무료 휴식소의 구실을 하였다. 이곳에는 승려나 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숙박할 수 있고 항상 밥과 죽을 준비하지만, 때마침 밥이 없으면 주지 않아도 되게끔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또, 승려과 속인, 즉 승속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함께 숙박하기 때문에 이름이 보통원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보통원은 나그네와 빈궁자들을 위해서 식사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료 숙박소 또는 무료 휴게소의 구실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