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사찰이다. 567년(신라 진평왕 28)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기록이나 유물로 고려시대 이전 연혁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시대 이후 사찰이 번성했으며 조선시대를 거치며 현재까지도 사찰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고려시대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567년(진흥왕 28) 법주사를 창건한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진표(眞表)의 제자 융종(融宗)이 고쳐서 다지 지었고, 923년(태조 6)에 고려 태조의 다섯째 왕자인 증통국사(證通國師), 1107년(예종 2)에는 자정국사(慈靜國師)가 중창하였다고 전하나 정확한 문헌자료나 유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청주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淸州 菩薩寺 石造二佛竝立像)을 고려시대 불상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확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보살사는 고려시대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고려 말 관료인 정추(鄭樞)의 『원재고(圓齋藁)』에 나옹 혜근이 청주 보살사에 있을 때 정추의 아이가 찾아 뵙자 혜근이 손수 ‘운산도(雲山圖)’를 그려주었다는 시가 남아 있는데, 고려말 혜근의 불교적 위치를 고려할 때 고려 말 청주 보살사는 일대의 주요 사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조에 사찰이 수록되어 있다. 현전하는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보살사는 17세기 여러 차례의 중수와 불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1626년(인조 4)에는 벽암(碧巖)의 제자 경특(瓊特)이 중수하였고 1683년(숙종 9)에 일륜(日輪)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시기 전각에 봉안할 불화도 제작되었는데, 1649년 조성한 ‘보살사 영산회 괘불도’는 당시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화승인 신겸(信謙)의 작품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조선 후기 보살사는 인근 사족들의 문집이나 족보 등을 간행하며 출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가 청주한씨 종친과 보살사 승려들의 주도로 간행되었고, 1634년(인조 12) 이안눌이 지은 「용재집발(容齋集跋)」에 증조부의 문집 간행을 청주 보살사에서 시작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사족들의 문집에도 보살사가 여러 번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686년(숙종12년)의 ‘ 을축갑회도(乙丑甲會圖) 및 죽림갑계문서(竹林甲稧文書)’는 계원들이 보살사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과 갑계의 기록으로 17세기 지역사회의 사족들과 사찰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처럼 보살사는 조선 후기 청주를 중심으로 하여 충북 지역에서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사찰이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극락보전과 요사채가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전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조선 선조대에 중수되었으며, 극락전 안에는 1976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이불병립상과 지장보살상, 삼존불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불병립상은 고려시대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삼존불은 조선시대의 목조불상으로 근년에 금으로 칠하였으며, 가운데 아미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좌우에 동일한 수법의 보살좌상 2구가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뒤에는 1759년(영조 35) 3월에 조성한 후불탱화(後佛幀畫)가 있는데, 18세기에 유행하였던 화려하고 복잡한 아미타불화의 통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극락전 좌측 벽에는 1902년에 조성된 극락회상탱(極樂會上幀)이 있는데, 청주 용화사(龍華寺)에 봉안되어 있던 것이며, 우측 벽에는 광무 연간에 조성한 칠성탱화(七星幀畫)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오층석탑과 중수비(重修碑), 석탑옥개석(石塔屋蓋石), 동종(銅鐘) 등이 있다. 오층석탑은 탑신 2층 몸돌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것이 확인되며 조선 중기의 석탑양식을 고증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 요사채 앞에는 고건물지(古建物址)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