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겸(信謙)은 조선 후기 경상북도 문경 대승사에서 형성되었던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를 이끌었던 수화승으로 1788년부터 1830년 사이에 활동하였다. 법호(法號)는 퇴운(退雲)이다. 신겸은 경상북도 문경 대승사와 김룡사, 의성 고운사에 머물면서 강원도, 충청북도,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행보를 펼쳤다. 그리고 불화에 국한하지 않고 단청, 불상 중수 및 개금, 목공예 등 사찰의 크고 작은 불사(佛事)를 담당하였다.
신겸은 화면 구성 및 존상 표현, 도상 등에 있어 같은 시기 활동한 화승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불화 화풍을 구축하였고 그의 불화는 19세기 후반 경상도와 경기도 화승에게 영향을 끼쳤다. 신겸의 활동 기간에 사불산화파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화승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신겸은 화승으로서 불사에 참여한 것만이 아니라 고운사 백련암을 중창하고 보사(補寺)와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염불계(念佛契)에 참여해 불교계의 일원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그리고 15년간의 경전 필사를 지속하면서 출가자로서의 수행 자세를 이어갔다.
신겸의 생몰년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아버지는 성해(性海)와 어머니 완산 이씨 옥현(玉賢)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해서는 환성지안의 후손인 괄허 취여(括虛 取如)와 취운 의정(醉雲 義貞)의 법맥을 이었다. 옹사와 스승인 괄허 취여와 취운 의정은 대승사와 김룡사에서 주요 승려였던 점으로 보아 신겸 또한 두 사찰 중 한 곳에서 출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겸의 이와 같은 배경은 대승사에서 형성된 사불산화파의 일원이 되어 화업(畵業)을 시작하고 수화승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신겸은 1788년부터 1790년에 단독으로 진영과 불화를 제작할 정도로 일찍부터 수화승으로 두각을 나타나며 19세기 전반 사불산화파를 이끌며 수 십여 점 불화를 제작하고 많은 사찰의 단청 작업을 진행하였다. 1820년에는 의성 고운사 백련암을 중창하고 조실(祖室)로 주석하였으며 문도(門徒)를 이룰 정도로 많은 화승과 제자를 배출하였다. 1830년 고운사 현왕도 초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겸의 활동이 보이지 않으며 입적 후 그의 진영은 김룡사 대성암에 모셔졌다.
신겸은 1788년에 홍안(弘眼)이 주관하는 남장사 불사에 사불산화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남장사 불사는 사불산화파만이 아니라 호남(湖南)과 경성(京城)에서 활동하던 화승들이 초청되어 괘불도와 유명회(幽冥會) 불화를 분담하여 제작하였다. 신겸은 남장사 불사를 계기로 홍안을 비롯한 사불산화파의 화풍 위에 경성화공의 화풍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불화 화풍을 구축하였다.
남장사 불사를 마무리한 직후 신겸은 영은사의 창건주와 중창주인 범일국사와 사명대사의 진영을 제작하고 1790년에 운수암 관음보살변상도를 조성하며 수화승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법주사 대웅보전 신중도(1795), 용문사 신중도(1796), 대전사 주왕암 영산회상도(1800) 등을 제작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화사 집단을 구성하였다. 신겸은 1803년에 홍안을 모시고 수연(守衍)과 함께 김룡사 대웅전과 응진전에 봉안되는 영산회상도와 신중도 등을 그리고 1804년에는 혜국사 대웅전의 영산회상도, 지장시왕도, 신중도를 조성하면서 사불산화파 수장의 위상을 갖춰나갔다. 김룡사와 혜국사 불사 이후 신겸은 1812년~13년 용문사 불화, 1821년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불화, 1822년 김룡사 화장암 불화, 1825년 지보암 불화 등 경상북도 사찰의 불화 제작을 주도하였고 1828년에는 경기도 중흥사 불화를 담당하는 등 명실상부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화승으로 거듭났다.
현재 신겸의 기년명 불화와 진영은 50여 점이 확인되며 그 외 제천 신륵사 극락전(1809), 은해사 백흥암 대웅전(1817), 남장사 극락보전(19세기 전반)의 단청에 관여하였으며, 삼척 신흥사 아미타불상(1791), 부석사 관음보살좌상(1796), 보문사 아미타삼존좌상(1811), 지보사 아미타여래좌상(1825년) 등 불상 개금에 참여하였다.
신겸은 화풍만이 아니라 도상과 형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시도하였다. 관음보살이 오른손을 내려뜨려 선재동자의 정수리를 만지는 모습[摩頂手]을 표현한 운수암 관음보살변상도(1790)부터 일면다비(一面多臂)의 예적금강(穢跡金剛)이 표현된 김룡사 신중도(1803),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는 주왕암 영산회상도(1800)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도상을 재인식해 협시보살로 그리고 지장보살을 권속으로 표현하는 등 기존 형식을 답습하지 않고 도상을 창안하였다. 재인식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불화를 제작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이다.
신겸의 이러한 실험적인 자세는 그가 남긴 5건의 불화초(佛畵草)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승물(乘物)을 탄 문수·보현보살을 묘사한 삼세불도(1812년), 그리고 새로운 구성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왕도초(1828) 및 42수관음보살도(1828)와 현왕도(1830)의 밑그림을 내었는데, 초본을 통해 자신의 구상을 시각적으로 완성하고자 한 것이다. 신겸의 불화는 이후 자우, 응상을 비롯한 사불산화파를 통해 19세기 후반까지 영향을 미쳤다.
신겸의 활동은 화승으로써 불화 조성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주목되는 것은 경전 필사이다. 신겸 불화의 특징은 윤곽선에 그치지 않고 채색을 장악하는 거침없는 필선이다. 신겸의 강인한 필선은 그가 18071815년에 필사한 화엄경소초와 18211824년에 필사한 묘법연화경의 필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