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94.5㎝, 가로 63㎝. 월정사 성보박물관 소장.강원도 삼척 영은사에 봉안되었던 범일국사진영은 1788년에 신겸(信謙)이 조성한 초상화로,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범일국사는 통일신라 말 고려 초에 성립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창주이다. 그는 831년(흥덕왕 9)에 당으로 유학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인 염관제안(鹽官齊安)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847년에 신라로 귀국해 백달산에 머물다가 명주(溟州: 오늘날 강원도 강릉)도독의 청으로 851년부터 강릉 굴산사에 머물며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하였고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으로부터 국사(國師)로 받들어졌다. 범일국사는 굴산사를 비롯해 강릉 신복사, 동해 삼화사 등 강원도 영동 일대의 사찰을 창건하였고 영은사도 이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삼척태백산영은사사적비(三陟太白山靈隱寺事蹟碑, 1830년)에는 당(唐) 태종 정관 26년 즉 선덕왕 16년인 652년에 범일국사가 영은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창건 연대가 역사와 부합하지 않지만 범일국사를 영은사의 창건주로 비정할 정도로 조선 후기까지 범일국사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영은사 범일국사진영은 1788년에 신겸이 제작하였다. 화면 왼편에 “창건주범일국사진영(刱建主梵日國師眞影)”이란 영제(影題)가 적혀 있다. 진영 속 범일국사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 발은 답대(踏臺) 위에 놓여 있다. 의자에 앉아 답대에 발을 올려놓는 진영은 결가부좌한 진영에 비해 고식(古式)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범일국사의 자세는 신체 비례가 맞지 않아 매우 부자연스럽다. 상체는 의자를 가득 매울 정도로 과장되고 이에 반해 내려뜨린 두 다리는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 빈약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두 팔과 손은 신체 비례와 상관없이 유난히 길고 크게 묘사되었다. 신겸이 제작한 전신교의좌상 형식의 진영에서는 이와 같은 표현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신겸이 범일국사진영과 같은 시기에 제작한 영은사 사명대선사진영, 김룡사 괄허대선사진영과 남악대선사진영 등도 상체를 유난히 강조해 그렸다.
범일국사는 정면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매와 큰 코, 넓은 이마와 튀어나온 광대 등 이국적이면서 강한 인상을 보여 준다. 청색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고 있으며, 청색 장삼은 남색으로 강하게 바림하여 음영 변화를 주었다. 두 손은 끝이 여의(如意)처럼 구부러진 주장자(拄杖子)를 비스듬히 쥐고 오른 팔목에는 장염주(長念珠)를 감고 있다. 권위를 상징하는 불자(拂子)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있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과 주장자를 비껴든 모습에서 창건주의 기세를 찾아 볼 수 있다. 배경은 녹색 벽면과 바닥의 화문석으로 이분화되어 있다. 홍색, 녹색의 선명한 색대비와 더불어 등받이천의 화문(花文), 화문석의 마름모꼴 장식과 의자의 장석(長石) 표현 등은 진영의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영은사 범일국사진영은 현재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안하여 보관 중이다. 화면은 습기에 의해 얼룩지고 범일국사의 왼쪽 부분은 바탕천이 드러날 정도로 안료가 박락되었지만 얼굴 및 다른 표현은 제작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완전하지 않지만 화기(畵記)가 있다. 그림틀은 액자형으로 화면 가장자리를 흰색과 녹색으로 마무리하는 조선 후기 장황 방식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만 원래 장황 위에 유리액자로 덧씌워 보관 중이다.
범일국사진영은 사찰의 창건주를 받드는 조사 신앙을 보여주는 동시에 통일신라 이후 영동 지역에 지속되어 왔던 범일국사 숭배 신앙을 보여주는 자료로 의미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진영 가운데 제작 연도와 제작자가 밝혀진 작품이자 화승의 개성적인 화풍이 반영된 완성도 높은 진영으로써 미술사적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