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상 ()

회화
인물
조선후기 동화사 칠성도, 통도사 서운암 칠성도, 은해사 운부암 원통전 아미타불회도 등을 그린 승려. 화승.
이칭
이칭
應祥, 應相, 기상(岐祥), 위상(偉相), 하은(霞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환성 지안(喚醒 志安) 문중
출생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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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후기 동화사 칠성도, 통도사 서운암 칠성도, 은해사 운부암 원통전 아미타불회도 등을 그린 승려. 화승.
개설

응상(應詳)은 19세기 후반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를 이끌던 수화승으로, 오늘날까지 사불산 불모(佛母)로 회자되고 있다. 법호(法號)는 하은(霞隱)이다. 응상은 은해사와 김룡사를 거점으로 동화사, 통도사, 대승사, 용문사, 해인사 등 경상남·북도부터 충청북도 채운암, 반야암에 화적을 남겼다. 그는 신겸(信謙)에서 자우(慈友)로 이어지는 사불산화파의 화풍을 계승하는 한편, 같은 시기에 서울·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활동하던 화승인 만파 정익, 화산 재근, 설해 민정, 수용 기전, 석옹 철유 등과의 작업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며 자신의 화승 집단을 이끌었다. 전통 위에 새로운 화풍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응상의 활동은 20세기 전반까지 사불산화파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생애

응상의 생몰년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출가 후 혜봉 법성(慧峰 法性)의 법제자로, 환성 지안에서 영파 성규(影波 聖奎)로 이어지는 법맥을 계승하였다. 은해사는 18세기 후반부터 영파의 문도가 주석했던 사찰로 응상 역시 이곳에서 출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 초반인 1855년부터 응상은 은해사를 기반으로 동화사, 통도사에서 두각을 보였다. 응상이 언제부터 김룡사에 정착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1880년에는 김룡사 승려로서 불화를 조성하였다.

응상과 사불산화파의 관계는 1862년 은해사 운부암 불화 제작에서 자우를 수화승으로 모신 사례에서 찾을 수 있다. 은해사 운부암 불사 이후 수화승으로 명성이 높아진 응상은 1880년 김룡사에 주석하면서 자우를 잇는 사불산화파의 수장이 되었다. 1890년 반야사 불화를 끝으로 더 이상 활동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후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동사항

응상은 보조 화승으로 활동한 기록이 없고 바로 1855년에 수화승과 대시주를 맡아 은해사 불상 개금과 후불도를 제작한 기록만 전한다. 현전하는 자료와 작품으로는 응상이 누구에게 불화를 배웠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속한 문중 어른인 영파 성규와 대은 호영(大隱頀韺)이 신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불산화파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응상의 불화를 살펴보면, 그는 은해사에서 활동하다 김룡사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1855년 은해사의 불상 개금과 후불도 조성을 마치고 1857년에 동화사 칠성도를 제작하고 1861년에는 통도사 서운암 칠성도를 조성하였다. 1862년에는 당시 사불산화파를 주도했던 의운 자우(意雲 慈友)를 수화승으로 모시고 은해사 운부암 원통전 아미타불회도와 아미타불회홍도를 제작하였다. 은해사 운부암 불사는 응상과 사불산화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례이다.

1870년대부터 응상은 사불산 화승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승들과 공동 작업을 하면서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갔다. 1876년에는 응상이 주관하는 도리사 영산회상도, 대승사 지장시왕도와 신중도 조성에 만파 정탁(萬波 定濯), 화산 재근(華山 在根) 등 서울·경기 지역에 기반을 둔 화승들을 포함해 경상도에서 활동했던 설해 민정(雪海 珉淨)과 수용 기전(繡龍 琪銓)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설해 민정과 수용 기전은 응상을 수화승으로 모시고 1879년 보경사 서운암 아미타불회도와 신중도를 제작하였고 연이어 1880년에 김룡사의 산내 암자인 금선대, 양진암의 불화 조성부터 1881년 도리사 칠성도과 압곡사 신중도, 1884년 용문사 영산전 영산회상도와 16나한도 및 상향전 아미타불회도 조성까지 관계를 이어갔다. 1888년에 응상은 석옹 철유(石翁 喆宥)를 작업에 합류시켜 김룡사 칠성도, 16나한도, 독성도를 완성하였다. 철유는 1876년에 응상이 주관하는 대승사 불화 제작에 보조 화원으로 참여하였지만 1888년에는 부편수(副片手)로 개성 강한 자신의 화풍을 반영해 불화를 제작하였다.

1855년부터 189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응상은 화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화풍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응상의 초기 화풍은 신겸에서 비롯된 19세기 전반 사불산화파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1862년 자우를 수화승으로 모시고 은해사 운부암 불사를 마친 후 응상이 제작한 분황사 신중도(1871년)에는 신겸의 화풍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도리사 영산회상도(1876)는 신겸이 제작한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영산회상도를 모본 삼아 제작된 것이다. 응상은 한 가지의 화풍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기보다는 동시기에 활동한 화승들의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1878년에는 만파 정탁, 화산 재근, 철유, 기형(機炯) 등을 자신의 화사집단에 받아들여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불화에서 사용되는 화면 구성과 표현 등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1879~1884년에는 설해 민정과 수용 기전 등 경상도 화승들과 작업을 하면서 19세기 경상도 화풍을 견지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1888년에는 응상의 불화에 석옹 철유가 그렸다고 할 정도로 얼굴 윤곽이 강하고 음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인물들이 묘사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역대서화가사전』상(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조선후기승장 인명사전』불교회화(안귀숙·최선일, 양사재, 2008)
「조선후기 영남의 불화와 승려문중 연구」(이용윤,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조선후기 사불산불화 화파의 연구」(김경미, 『미술사연구』236, 한국미술사학회, 2002)
집필자
이용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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