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25.5㎝, 가로 81.5㎝.문경 대승사 묘적암에 봉안되어 있는 나옹화상진영은 1803년에 신겸(愼兼)이 조성하였다. 나옹화상은 오른쪽을 향해 결가부좌한 전신좌상(全身坐像)에 주장자와 염주를 든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얼굴과 신체 및 장삼과 가사의 옷주름 표현에서 제작자인 신겸의 화풍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나옹혜근은 1347년(충목왕 3)에 원(元)의 연경에서 지공(指空)선사의 법을 계승하였다. 공민왕 때 고려로 귀국해 회암사의 주지가 되고 왕사(王師)로 봉해졌으며 보제존자라(普濟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나옹혜근은 1340년(충혜왕 1)에 대승사 묘적암의 요연(了然)스님에게 출가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묘적암에는 나옹화상진영이 봉안되었다.
나옹화상진영을 그린 신겸(愼兼)은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를 이끌었던 수화승(首畵僧)이다. 사불산에 위치한 대승사는 신겸의 옹사와 스승인 괄허취여(括虛取如)와 취운의정(醉雲義貞)이 주석했던 사찰이다. 대승사에 기반을 둔 화승 신겸은 산내 암자인 묘적암의 나옹화상진영의 제작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화상진영은 화면 왼편에 “공민왕사나옹대화상(恭愍王師懶翁大和尙)”이란 영제(影題)가 적혀 있다. 나옹화상은 고려왕사로서 위엄있는 모습보다는 조선 후기 선사(禪師)로 표현되었다. 화면 중앙에 나옹화상은 청색 장삼에 붉은 가사를 입고 있으며 한 손에 주장자(拄杖子)를 쥐고 다른 손에는 단염주(短念珠)를 쥐고 있다. 등 뒤에 가리개가 있으며 가리개에 용두불자(龍頭拂子)가 걸쳐 있다. 배경은 바닥에 화문석과 가리개로 이분화되었다. 화문석과 가리개는 19세기 진영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며, 배경과 가리개의 격자문은 18세기 후반부터 사용된 문양이다.
나옹화상의 청색 장삼과 홍가사, 단염주 · 주장자 · 불자의 표현 등은 신겸이 1795년에 제작한 김룡사 화장암의 침운당선사진영과 구성이 유사하다. 다만 얼굴과 신체 비율에 있어 나옹화상진영은 사실성이 크게 떨어진다. 즉 얼굴은 타원형에 이마와 광대가 둥글게 튀어나와 있는데 이는 신겸이 불보살과 나한을 그릴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넓은 어깨에 긴 허리와 팔, 상대적으로 좁은 무릎 폭으로 이루어진 신체 역시 신겸의 보살도에서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신겸은 나옹화상진영을 제작하면서 실존 인물보다는 보살이나 나한에 가깝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얼굴과 신체 표현 외에도 가사 끈을 고정하는 금박의 가사 고리, 무릎 위에 과장되게 너풀대는 소매자락 또한 신겸의 특징적 표현이다.
나옹화상진영은 대승사 묘적암의 인법당에 모셔져 있다. 화면은 왼편이 사선으로 찢어지고 안료가 일부 박락되었지만 제작 당시의 표현과 색감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액자형의 그림틀에 화면 외곽을 흰색과 녹색으로 마무리하는 조선 후기 장황 방식 또한 그대로이다. 화면 하단에는 제작 시기와 봉안처, 화승 및 제작에 참여한 이들을 기록한 화기가 적혀 있다.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진영은 출가처의 역사성과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어 온 나옹화상에 대한 조사 신앙(祖師信仰)을 보여준다. 동시에 조선 후기 사불산화파를 대표하는 화승 신겸의 화풍이 반영된 진영이라는 점에서 불교사와 불교회화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