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며, 1868년(고종 5)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법사(淨觀法師)가 관음전(觀音殿)을 건립하여 천일기도를 올렸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건립하였으며, 1932년에는 대방 6칸과 요사채 3칸을,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중수하고 보타전(寶陀殿)을 중건하였다.
이 절은 사찰 자체보다 높이 10m의 바위 남쪽 면에 새겨진 관음보살상으로 더 유명하다. 2014년 보물로 지정된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은 오래 전부터 흰 칠을 하였고 근년에 지붕을 씌워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이라 칭하였는데,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이 마애불은 예로부터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와서 기도하고 영험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의 태조가 기도한 일이 있고, 또 흥선대원군의 부인이 아들인 고종을 위해서 자주 찾아와 기도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애불에는 1편의 영적기(靈蹟記)가 전해지고 있다. 1807년(순조 7)에 고양군 신도면에 살았던 윤덕삼(尹德三)이라는 노총각은 나무 장사를 하여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그는 홍제동에서 자하문을 넘어 나무를 팔고 돌아올 때마다 이 석불 앞에서 수십 번씩 절하면서 아내를 얻어 아이를 낳고 부자가 되어 나무 장사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100일이 넘은 어느 날, 꿈에 한 노부인이 나타나서 “내일 새벽 자하문에 나가 문이 열리거든 첫 번째 성 밖으로 나오는 여인을 집으로 데리고 오면 소원을 이루리라.”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자하문이 열릴 때 윤 도령을 찾아간다는 처녀를 만났는데, 그녀 역시 전날 밤에 윤 도령과 백년해로하라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석불에 예(禮)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서 낭자가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전답과 산을 사고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자손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