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옥천암 마애보살 좌상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옥천암에 있는 고려 시대에 조성된 높이 4.83m의 마애불이다. 2014년 보물로 지정된 5m 정도의 대형 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산비탈에 면한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하얗게 호분이 발라져 있다.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 보관을 썼고, 각 면에는 동일한 패턴의 꽃문양 무늬가 있다. 이 보살상과 관련한 기록은 15세기 『용재총화』에 처음 등장한다. 이 보살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을 보인다.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수준 높은 불상이다.
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483㎝, 무릎 폭 344㎝. 5미터 가까이 되는 대형의 마애보살좌상으로, 불상의 전면에 흰색 호분으로 칠해져 있어 일명 ‘보도각 백불’로 불린다. 서울에서 이름난 명소였던 옥천암은 일찍부터 ‘불암(佛巖)’으로 알려져 있던 고찰이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때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 마애보살상과 관련하여 여러 기록들이 전한다. 우선 15세기 후반에 활약한 대학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처음으로 이 마애불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장의사 앞 시내… 물줄기를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불암(佛巖)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겼다”라는 매우 구체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5세 후반 경에는 이미 마애보살상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이후 불상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불상이 새겨진 바위라는 의미의 ‘불암(佛巖)’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의 기록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19세기 이후의 기록인 『동국여도(東國輿圖)』, 『한경지략(漢京識略)』, 『청우일록(靑又日錄)』(1881년 4월 19일자), 『조선명승실기(朝鮮名勝實記)』(1914년 간행),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등에 마애보살상과 함께 보도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18세기 후반부터 옥천암이라는 명칭이 등장했고, 19세기 이후로는 ‘해수관음(海水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또는 ‘백불(白佛)’로 불리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868년(고종 5)에는 명성황후가 해수관음 곁에 관음전을 지었다는 기록과 함께 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모친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옥천암에서 기도를 하며 호분을 발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보살상은 옥천암 앞을 흐르는 불천(佛川, 현재 홍제천) 냇가 산비탈에 면하여 높이 약 6m 정도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보살상의 전면에는 백의관음을 연상하듯 하얗게 호분이 발라져 있다. 머리에는 삼면 절첩형 보관을 썼고, 각 면에는 동일한 패턴의 화문을 새겨 넣었다. 보관의 좌우에는 쇠뿔 모양의 관대가 뻗어 있으며, 관대의 아래에는 타원형의 영락 장식이 달려 있다. 이러한 보관의 형태는 고려 초기의 김천 광덕동 석조보살입상과 비교되지만, 보관의 형태나 새긴 문양, 기법 등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둥글고 갸름한 얼굴에 반개한 눈꼬리를 약간 올린 시선은 예배자를 향했으며, 콧날은 반듯하고 사실적이다. 깊은 인중 아래 적당한 크기의 입술을 도톰하게 나타내어 전반적으로 단정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이목구비의 표현은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상과 유사하다. 삼도를 뚜렷하게 표현한 목과 양팔에는 장신구를 부착하였다. 넓은 띠 모양의 목걸이에는 보관에 새겨 넣은 것과 유사한 꽃무늬를 새겨 넣어 장엄하였다.
신체는 암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새겼으며 불신에는 천의를 걸쳤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는 불신을 타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가슴에 비스듬히 걸친 천의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멋스럽게 교차해서 빼내었다. 오른손은 들어 엄지와 중지를, 왼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다. 구부린 손짓 하나 하나가 경직되지 않고 신경이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있어 조각상으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길상좌를 취한 두 발은 모두 노출되었으며, 무릎 앞으로는 왼쪽 무릎과 오른쪽 무릎의 주름 방향을 어긋나게 표현하여 변화를 주었다.
이 마애보살좌상에 보이는 삼면 절첩식 보관과 뿔 모양의 관대, 타원형의 보관 장식, 천의식 착의법 등은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보타사 마애좌상과 형식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거의 흡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 보살상의 천의식 착의 형식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성된 보살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이 마애보살상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에 조선 전기 이전에 조성된 마애보살상임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어떤 신앙적 배경 아래 조성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는 해수관음 또는 백의관음, 즉 관음보살로 인식하였고 열렬히 신앙되어 왔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거친 바위 면에 새겼음에도 그 형태가 단정, 우아하고 선의 흐름이나 신체의 비례 등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고려시대의 수준 높은 마애보살좌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