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상은 먼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고 현재 도솔천에서 수행 교화하고 있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보살상이다. 머리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신체에 화려한 장신구를 한 장엄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미륵보살상의 형식은 단독 혹은 관음이나 아미타불과 결합하여 구성되기도 한다. 주존을 미륵보살로 하는 법상종이 융성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미륵보살상이 제작되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조성된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상은 한국 특유의 독창성이 돋보인다. 미륵신앙은 현세적 신앙이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할수록 각광받으며 그 상도 조성되었다.
미륵보살상은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이라는 상생경전에 의거해서 조성된다. 이 경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사위국(舍衛國)에 있을 때 제자인 아일다(阿逸多)에게 12년 뒤 목숨이 다하면 도솔천에 태어나 후세에 미륵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수기(授記)의 내용과 도솔천 내원궁에서 수행 · 교화하고 있는 미륵보살의 모습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미륵보살은 미래세에 성불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보살이기 때문에 형상으로 표현될 때는 대개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신체에는 화려한 영락과 장신구로 장엄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미륵보살상의 형식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단독의 만들어진 독존상을 비롯하여, 관음과 더불어 석가여래삼존상을 구성하기도 하며, 과거칠불과의 병존(並存), 석가 · 다보여래와의 삼존, 또는 석가 · 제화갈라보살과의 삼존 구성 등을 통해 붓다의 진리가 영원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아미타불상과 결합하여 타력신앙(他力信仰)과 자력신앙(自力信仰)이라는 불교의 대표적인 신앙형태를 대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화에서는 미륵보살과 미륵불을 같은 화면상에 등장시켜 상 · 하생 신앙을 극적으로 연출하기도 한다.
불교미술의 발생지인 인도 초기의 미륵보살상의 모습은 바라문(婆羅門) 수행자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수행자적(修行者的)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머리형태는 터번이나 보관을 착용하지 않고 긴 머리를 묶어 올렸으며, 손에는 수행자의 상징인 물병을 들었다. 이러한 도상은 꽤 오랫동안 미륵보살의 도상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굽타시기 말부터 미륵보살상은 대승보살(大乘菩薩)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를 착용하고 보관 중앙에는 보탑(寶塔)을 표현하고, 손에는 미륵의 깨달음의 나무인 용화수(龍華樹)의 꽃가지를 든 용화수인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초기의 미륵보살상은 역시 인도 초기의 미륵보살상과 거의 같은 모습이지만, 보관을 쓴 머리에 화불(化佛)이 표현되었고 의자에 앉아 다리를 서로 교차한 교각좌(交脚坐)가 미륵보살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과 함께 미륵보살의 중요한 도상적 특징 중 하나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한쪽 팔을 허벅지에 기대어 손가락을 뺨에 대어 깊이 사유하고 있는 반가사유상이다.
반가사유상은 싯다르타 태자사유상에서 유래한 것인데, 점차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면서 반가사유상에도 미륵의 성격이 부가되기에 이르렀다. 즉 싯다르타 태자의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에 찬 사유와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미륵보살의 사유는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같은 것이어서 동일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특히 신라에서는 미래의 주역인 화랑과 결부시켜 크게 유행하였으나 통일신라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미륵보살을 주존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융성하면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감산사지 미륵보살상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미륵보살상도 만들어졌다. 특히 고려시대에 조성된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상이나 부여 대조사 미륵보살상 등은 한국 특유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미륵보살상이다. 즉 머리에는 면류관 형태의 보관을 쓰고 불신(佛身)에는 여래의 불의(佛衣)와 간략한 장신구를 부착한 여래와 보살의 이미지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하나의 상에 미륵의 상 · 하생이라는 이중적 신앙구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여기에 전륜성왕의 이미지를 더함으로써 미륵신앙을 완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미륵신앙은 죽어서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수동적 신앙이 아니라 현세 불국토(佛國土) 건설을 명제로 하는 능동적인 신앙이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할수록 더욱 각광을 받았고, 그 결과 민중들은 미륵보살을 조성하여 전륜성왕의 출현과 미륵보살의 하생을 동시에 갈망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