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고성사 목조 삼불 좌상 및 복장유물 ( )

강진 고성사 목조삼불좌상
강진 고성사 목조삼불좌상
조각
유물
문화재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고성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그 복장유물.
정의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고성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그 복장유물.
개설

2013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석가여래상의 높이 133㎝, 아미타여래상의 높이 124㎝, 약사여래상의 높이 123.7㎝. 고성사 대웅전의 주불로 봉안된 삼불좌상이다. 본존은 사바세계의 교주 석가여래이며, 좌우 협시불은 동방 유리광세계를 주재하는 약사여래와 서방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이다.

제작 시기

1997년에 본존불에서 가로 60.2㎝, 세로 34.8㎝의 장방형의 한지에 묵서한 개금발원문이 발견되었으나, 조성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높은 무릎과 큰 두부, 짧은 턱, 깊이가 얕고 한층 간결해진 선묘 등 양식적인 면에서 17세기 중·후반기에 활약한 응혜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757년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개금발원문에서는 원래 이 삼불상이 강진현(康津縣) 불용산(佛聳山) 수청사(水淸寺)의 대법당에 봉안된 불상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불상의 개금은 수조각승 상정(尙淨)을 비롯하여 묘징(妙澄), 관해(觀海), 보명(宝明), 우학(宇學), 취진(就眞), 영철(潁哲) 등 모두 7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정은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도금양공(塗金良工) 호남(湖南) 상정(尙淨)’으로 언급되며 처음에는 주로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경상북도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힌 조각승이다.

내용

본존 석가여래는 좌우협시보다 약간 크게 제작하여 주존으로서의 존격을 부각하였다. 반구형의 머리는 나발을 따로 만들어 촘촘히 부착하였으며, 중앙과 정상에는 반구형과 원통형의 계주를 표현하였다. 얼굴은 둥글넓적하며 이마는 넓고 반듯하고 양미간에는 작게 돌출한 백호를 표현하였다. 활처럼 휘어진 눈썹은 양미간에서 삼각형의 콧등을 이루며 오뚝한 콧날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를 형식적으로 나타냈으며, 가슴의 쇄골선도 여타의 조선 후기 불상처럼 사실성을 벗어던지고 추상적이고 형식적으로 표현하였다.

착의는오른쪽 어깨를 새 덮은 변형의 편단우견이며, 가슴에는 꽃모양으로 멋있게 주름 잡은 군의(裙衣)의 윗단을 표현하였다. 복부는 볼록하게 처리하여 불상의 영적(靈的)인 기운과 신체의 자연스러운 윤곽을 드러냈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쭉 뻗어 촉지인을 결하였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였다. 길상좌로 앉은 무릎은 높으며, 발목 아래로 넓은 ‘八’자형 주름을 두고 그 좌우로 두 가닥의 사선주름을 간결하게 새겨 넣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주름 표현은 응혜파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좌우 협시불상은 본존불과 달리 이중착의법으로 대의를 걸쳤고, 수인은 좌우 협시 모두 양손을 무릎 바로 위에 올려놓고 장단을 맞추듯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었다. 가슴에는 사선으로 한번 접은 군의(裙衣)가 표현되었고, 전반적으로 본존불보다 작고 왜소하게 표현하여 변화를 주었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불의(佛衣)의 불필요한 주름은 최대한 억제하였고, 간결하면서도 골이 깊지 않은 강직한 선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 불상들이 보여주는 순박하고 온화한 상호의 표현이나 단구의 신체 비례, 무릎의 주름 표현 등은 경남 창녕 관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1652년, 응혜), 전남 순천 동화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57년, 계찬), 담양 회적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1660년, 응혜) 등 응혜(應惠)·계찬파(戒贊派)의 조각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복장유물로 아미타여래개금발원문(1751년)을 비롯하여 불설천지팔양신주경, 사경합부, 육경합부, 묘법연화경 등 발원문 1점, 전적 24점이 발견되었다. 육경합부만 조선 세조 연간에 간행된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

양대 전란 이후 17세기에 크게 유행한 석가여래삼불형식으로, 단구의 신체 비례와 간결한 선묘, 평담하고 대중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17세기 중·후반의 조각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751년에 작성된 개금발원문을 통해 이 삼불상의 원래 봉안처와 18세기 중·후반경 크게 활약한 조각승 상정 등이 개금에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있어 불상의 중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조선후기 조각승 열전』(최선일,양사재,2018)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송은석,사회평론,2012)
『조선후기 조각승과 불상 연구』(최선일,경인문화사,2011)
『조선후기승장인명사전』불교조소(최선일,양사재,2007)
「조각승 응혜파 불상조각의 연구」(손영문, 『불교문화연구』8, 한국불교문화학회, 2006)
집필자
손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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