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석조불상 중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서 크기가 17.8m이다. 일명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도 하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기록을 통하여 고려시대인 968년경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찬술된 『관촉사사적기』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조성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때인 970년부터 목종(穆宗) 때인 1006년까지 혜명(慧明) 스님이 장인 100여 명을 거느리고 관촉사와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치 실측이라도 한 듯이 각 부위의 수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상의 높이는 55척(尺) 5촌(寸)이며, 둘레는 30척, 귀의 길이는 9척, 미간(眉間)의 폭은 6척, 입의 크기는 3척 5촌, 보관(寶冠)의 높이는 8척, 대개(大蓋)의 폭은 11척, 소개(小蓋)의 폭은 6척 5촌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미륵보살’이니 ‘관음보살’이니 하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불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성현(成俔)의『허백당시집(虛白堂詩集)』에 보이는 ‘관촉사’라는 시 외에 많은 시인 묵객들에 의하여 회자되곤 하였다.
충청남도 논산 반야산(般若山) 기슭의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통적인 불상이나 보살상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이 존상이 보살상이라는 것은 장방형의 보관(寶冠 : 보배로운 모자)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를 살짝 덮고 흘러내린 세 가닥의 머리카락, 지금과 같이 연꽃 같은 것을 들고 있었을 지인(持印 : 물건을 들고 있는 손 자세), 오른손 손목에 보이는 팔찌가 입증해 준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몸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상당히 큰 편이다. 전체적인 비례도 잘 맞지 않는다. 또한 얼굴에 꽉 차게 표현된 이목구비(耳目口鼻), 부풀어 오른 듯한 양 볼과 이중 턱은 보살상이 갖추고 있어야 할 종교성은 커녕, 살이 찐 세속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눈썹에 비해 지나치게 길게 표현된 후리부리한 눈, 두터운 입술과 큰 입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게 처리된 모습은 원통형의 짧은 목, 얼굴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어깨, 그리고 장방형의 돌을 포개어 쌓은 듯한 불신(佛身)에서도 확인된다.
석조미륵보살입상에 보이는 얼굴과 손이 강조된 표현은 고려시대 977년에 조성된 고령 개포동(開浦洞) 마애보살좌상과 981년의 이천 장암리 마애보살좌상 등 10세기 후반에 조성된 보살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조성된 석불 입상의 모델이 되었다.
전통적인 불상관(佛像觀 : 불상에 관한 관념)과는 전혀 다른 비례와 표현법을 보여준다. 얼굴은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한 흔적이 보이나 몸은 대충 괴체감이 있는 몇 개의 돌을 쌓아 올려 만들었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치 초기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와 손을 몸에 비해 크게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가장 큰 석조불상으로, 고려시대 10세기 후반의 충청도 지방에서 조성된 석조불상의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