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결하고 결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은 높이가 105㎝이며, 무릎의 폭이 85㎝이다. 종이와 삼베를 몇 겹씩 발라서 옻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건칠 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칠 불상이 고려 후기에 유행하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불상도 조성된 듯하다.
건칠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복장 유물이나 조성 배경을 알려 줄만한 기록은 없다. 사찰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시대 충렬왕 때 왕자 왕소군(王小君: 王湑)이 1276년에 출가하여 이 절을 중창하였다고 하지만, 불상의 양식적인 편년과는 차이를 보여 이 때 조성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불상은 불두와 상체가 앞으로 약간 웅크린 듯 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된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다. 수인은 아미타불의 설법인으로서,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육계에는 후대에 보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상 계주와 원래의 것으로 보이는 중앙계주가 있다. 둥근 얼굴에 살짝 내려 뜬 눈, 적당히 다문 입 등 단정하면서 근엄한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부드럽고 둥글게 처리되었으며, 가슴과 복부도 탄력감 있게 표현되었다. 통견 형식으로 착의한 법의의 옷주름도 신체의 윤곽을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다만 고려시대 13세기에 보이는 불상의 옷주름 보다는 간략화되었는데, 특히 왼쪽 어깨의 옷주름과 왼쪽 무릎 앞의 삼각 형태의 주름 표현에서 단순화된 경향이 보인다. 가슴 아래에는 승각기와 군의를 묶는 띠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오른발은 노출되었지만, 왼발은 대의 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다.
X-ray로 촬영한 결과, 불상의 상호와 불신은 건칠로 제작되었고, 양손은 나무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여 표현하였다. 불상에 보이는 상호의 표정과 신체 비례, 옷주름 표현 등은 1274년 이전에 조성된 서울 개운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으로부터 14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화성 봉림사의 아미타불좌상으로 연결되는 고려말 조선초의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대둔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은 상호의 표정이나 신체 비례, 착의법, 수인 등에서 고려후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왼쪽 팔꿈치 윗부분의 옷주름 표현에서 고려 후기 불상 특유의 Ω형 주름이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간략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고려말 조선초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은 나주의 심향사 건칠여래상 등 주로 전라도 지역의 몇 예만이 확인됨으로써 경상도에 소재한 이 불상을 통하여 고려후기 건칠여래상 조성이 경상도에서도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 준다. 특히 건칠여래상으로서는 대형에 속하는 1m가 넘는 크기라는 점도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