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금동여래입상이다. 1919년 부여 부소산성 사비루(泗庇樓)에서 발견되었다. 청동 위에 도금(鍍金)하여 만든 것으로, 8.5㎝의 크기이다. 좌협시 보살상의 대부분이 부서져 없어지고, 일부 도금된 부분이 벗겨진 상태이다. 불상 광배 뒷면에 새겨진 16자의 명문은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부인을 위하여 이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 언제 어떤 성격의 불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커다란 광배(光背 : 붓다의 몸에서 나온 빛의 표현) 안에 불상과 협시 보살상 2구가 표현되어 있는 일광삼존불상(一光三尊佛像)이다. 불상은 작은 크기이지만,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져 상호(相好 : 얼굴)의 표정 뿐만 아니라 문양의 세부적인 특징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상과 광배, 대좌는 함께 주조되었으며, 수은아말감기법(수은과 금가루를 혼합하여 표면에 바른 다음, 열을 가하면 금가루가 청동 불상의 표면에 붙을 수 있게 수은이 접착제 역할을 함)으로 도금되었다.
주존인 불상은 통견(通肩 : 옷이 양쪽 어깨를 덮고 있는 것) 형식으로 법의(法衣 : 불상의 옷)를 입고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시무외인(施無畏印 :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의 수인)을, 왼손은 아래로 내려 뜨려 여원인(與願印 : 소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의미의 수인)을 취하였다. 불상은 초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인 머리와 손이 몸에 비해 큰 편이며,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육계(肉髻 : 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와 장방형의 상호를 갖추고 있는데,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은 4등신(等身)의 비례에 부드러운 조형을 갖추고 있다. 법의의 끝자락은 ‘八’자 형태로 펼쳐져 대좌 옆으로 내려오고 있다. 얼굴만 남아 있는 좌협시 보살상은 보관(寶冠 : 보배로운 모자)을 쓰고 있다. 우협시보살상은 3등신의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불상과 같이 법의는‘八’자형이다.
광배는 윗부분이 뾰족한 연잎 형태로서, 두광(頭光 : 머리 주위의 빛의 표현)과 신광(身光 : 몸 주위의 빛의 표현)을 따로 구획하였으며, 그 바깥에는 도식화된 불꽃 문양이 좌우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광배의 윗부분에는 앙련(仰蓮 : 연꽃이 활짝 핀 모습) 형식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화불(化佛 : 작은 불상)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마치 그릇을 엎어 놓은 듯한데, 표면에는 복련(覆蓮 : 연꽃이 덮어져 있는 모습) 형식의 단판연화문(單瓣蓮華文 : 연잎 하나로 이루어진 연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대좌 밑 안쪽에는 일정 부분 공간을 이루고 있다.
한편 광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정지원이 죽은 아내 조사를 위하여 삼가 금상을 만들어 빨리 삼악도(三惡道)에서 벗어나길 바란다(정지원위망처조사경조금상조리삼도(鄭智遠爲亡妻趙思敬造金像早離三塗))”는 내용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불상이 백제의 고도 부여(扶餘)에서 발견되었지만, 명문에 보이는 정씨와 조씨가 정작 백제 성씨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명문의 내용은 6세기 후반 삼국시대 사람들의 불교적인 내세관(來世觀:내세에 대한 관념)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은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발견되었지만, 백제에서 조성되었다는 어떠한 내용도 명문에서 확인되지 않아 백제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 6세기에 유행하던 일광삼존불상의 한 예로서, 광배 뒷면에 1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 불상의 광배에는 적어도 화불이 3구 이상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불상에서는 1구만 보이는 것도 특징이다.
금동정지원명석가여래삼존입상은 구체적인 조성 시기와 불상의 성격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소규모의 불상들이 개인적인 내세(來世)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