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바다이다. 제주도를 비롯하여 섬이 많으며 해안지형이 매우 복잡하다. 제주도·거제도·남해도·가덕도·한산도·완도·돌산도·거문도·나로도 등이 있으며, 해남반도·고흥반도·여수반도·통영반도 등이 있다. 동해에 비하면 수심이 얕아서 거의 대륙붕으로 되어 있다. 연중 난류가 흘러 양식업 등 수산업이 매우 발달하였다. 한려수도를 비롯한 해상공원 및 임해공업지대로 해안의 이용 가치가 크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잘 이용하여 한산도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남해안의 구역은 넓게는 일본 대마도(對馬島)와 제주도 사이의 한반도 남부를 뜻하나, 자세히는 부산 부두에서 전라남도의 남해갑(南海岬)까지를 말한다. 직선 거리는 255㎞, 지절률(肢節率)은 8.81, 해안선의 길이는 섬을 제외하고 2,251㎞, 섬만으로는 4,654㎞에 이른다. 주요 섬으로는 제주도 · 거제도 · 남해도 · 가덕도 · 욕지도 · 사량도 · 한산도 · 완도 · 돌산도 · 거문도 · 나로도 · 소록도 · 노화도 · 금오도 등이 있다. 주요 반도로는 해남반도 · 고흥반도 · 여수반도 · 통영반도 등이 있고, 만은 득량만 · 순천만 · 광량만 · 진해만 등이 있다.
해안선이 복잡한 데다가 연근해에는 섬이 많고 파랑의 작용이 약하여 대규모의 사빈(砂濱) 발달에는 부적당하다. 제주도의 성산포에는 육계도(陸繫島)의 발달도 볼 수 있으며, 암석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식애(海蝕崖)는 거제도의 해금강에 잘 나타나 남해안의 관광지가 되고 있다. 남해안의 침수량은 동쪽보다도 서쪽이 크며 전라남도에 이르면 가장 커진다. 따라서 섬의 수는 전국의 55.7%를 전라남도가 차지하고 있으며, 거제도 · 남해도 · 진도 등 많은 섬들의 방향이 거의 비슷하다.
동해에 비하면 수심이 얕아서 황해와 더불어 거의 대륙붕으로 되어 있으며, 최근 양식업이 활발해져서 그 이용도가 높다. 남해의 평균 수심은 100m, 최고 깊이는 210m이고, 빙기(氷期)에는 해면이 현재보다도 100m 이상 낮았기 때문에 이곳은 육지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대륙의 지절(肢節)이 침강하여 대한식 리아스(大韓式 Lias)를 형성하고 있다. 해류는 연중 난류가 흘러 양식업 등 수산업이 매우 발달하였고, 한려수도를 비롯한 해상공원 및 임해공업지대로 해안의 이용 가치가 크다. 남해는 황해와 함께 대륙붕으로 되어 있어, 빙기의 낮은 해면이 상승하면서 북서 방향으로 점차 침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상호(金相昊)는 근재형 화경농업(根栽型火耕農業)이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가 서기 전 5,00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시기는 해면이 점차 상승하던 때로써 이 농업문화가 남해를 거쳐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제주도에는 근재형 화경농업의 특색에 대비되는 생활양식이 남아 있음이 주목된다. 해면이 현재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진 뒤에도, 남해에는 섬이 많고 파랑의 작용이 약하여 해상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삼국시대에 이미 백제와 일본은 남해를 통하여 교류가 활발하였다. 통일신라 때에 장보고(張保皐)는 남해의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해적들을 토벌하고 당나라 및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하였다. 또한 남해에는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를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영(水營)을 각각 둘씩 설치하고 있다. 이순신(李舜臣)은 본래 전라도좌수사로서, 임진왜란 때에 한산도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고, 정유재란 때에는 명량(鳴梁)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하였다. 그는 드나듦이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잘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마한(馬韓) 사람들 가운데 문신(文身)을 한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왜(倭)의 수인(水人)과 같이 문신을 함으로써 대어(大魚)와 수금(水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 당시 남해안에서 어로 활동과 해양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해의 대표적인 어류는 멸치 · 갈치 · 고등어 · 전갱이 · 쥐치 등이고, 해삼 · 전복 · 파래 · 우뭇가사리 같은 패조류도 있다. 이와 같은 어류들을 어획하는 데 주로 사용한 어구로는 소대망류(小臺網類)와 걸망(榤網)이 있다. 조선 말기에 남해안 지역에서 특히 많이 사용하였던 정치망의 종류는 그 형상에 따라 밧줄로 어구를 고정시킨 줄시(乼矢)와 목제로 된 지주로써 어망을 고정시킨 장시(杖矢)로 나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경상도산 수산물이 기재되어 있는데, 거기에 기재된 빈도수 순으로 열거하면 어류는 은구어(銀口魚) · 사어(沙魚) · 대구어(大口魚) · 청어(靑魚) · 광어(廣魚) · 쌍어(雙魚) · 홍어(洪魚) · 황어(黃魚) · 방어(方魚) · 도음어(都音魚) · 연어(年魚) 등이고, 패류는 생포(生鮑) · 홍합(紅蛤) · 황합(黃蛤), 해조류는 곽(藿) · 해의(海衣) · 우모(牛毛) · 세모(細毛) · 해채(海菜) · 청각(靑角) · 조곽(早藿) 등이다. 기타 수산 생물로는 문어(文魚) · 자하(紫蝦) 등이 있다.
그 뒤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 『세종실록』 등에도 어패류 및 해조류의 종류가 다채롭게 기록되어 있다. 이 수산물들의 명칭은 수산 생물의 분류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명칭상의 혼동도 있고, 오늘날 어떤 생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불분명한 것도 많다. 하지만 『한국어보』를 보면 대략 설명이 되어 있다.
1883년(고종 9)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에 의하여 일본인들은 조선의 통어권을 획득한 뒤 조선 근해에서 많은 어로행위를 하였고, 동시에 불법적인 어로행위도 자행하였다. 1900년경부터 남해안에서는 청어와 대구를 호망(壺網) · 대부망(大敷網)이라는 일본식 정치망을 도입하여 어획하였다. 그리고 우리 어민들의 주요 어획 대상이던 멸치도 처음에는 권현망(權現網)을 주로 사용하여 어획하였으나, 점차 양조망(揚操網) · 건착망(巾着網) 등을 사용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일본인이 경영한 30여 종의 어업 중에서 도미 어업과 멸치 어업이 가장 성행하였고, 그 밖에 조기 안강망어업(鮟鱇網漁業), 상어 연승어업(延繩漁業), 삼치와 방어의 유자망어업(流刺網漁業), 고등어 낚시 어업, 포경업(捕鯨業) 등도 성행하였다. 남해안은 해양생물의 서식에 적합하여 각종 어류가 풍부하다.
따라서 여러 가지 어구와 어법이 발달하고 있다. 남해의 주어종은 멸치와 갈치인데, 멸치는 진해 앞 바다를 중심으로 남해안 전역에서 어획되고 있다. 이 밖에 많이 잡히는 어종으로는 전갱이 · 고등어 · 적어(赤魚) · 상어 · 도미 · 방어 · 가자미 · 삼치 · 조기 · 광어 · 숭어 · 복어 · 문어 · 오징어 등이다. 이 어류들을 잡는 어법은 연안 수역에서는 정치망으로 잡고 먼바다에서는 저인망 · 유자망 · 건착망 등으로 어획한다. 기타 안강망 · 권현망 · 낚시 및 잠수기(潛水器) 등도 이용한다. 참대구는 겨울철에 진해만 근처에서 많이 어획되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잡히지 않고 있으며, 고등어도 30년 전에 비하면 아주 적게 잡힌다.
남해안 일대에는 여러 가지의 패류와 해조류가 양식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굴양식을 가장 많이 하고 있으며, 여기서 양식된 굴은 구미 지역에서 수출도 한다. 굴 이외의 패류로는 백합 · 참조개 · 홍합 등이 있고, 해조류로는 완도 등지의 김양식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