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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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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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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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는 ‘崇魚’로 표기하며, 치어(鯔魚)·수어(秀魚·水魚)라고도 하였다. 학명은 Mugil cephalus LINNAEUS.이다.

몸은 홀쭉하고 길며 측편(側扁)하다. 머리 위가 약간 편평하고 위턱이 아래턱보다 조금 짧다. 비늘은 약간 크고 둥글다. 눈에는 지방질의 눈꺼풀이 발달하고 있는데, 이는 겨울에 가장 잘 발달하여 눈이 먼 것처럼 보인다. 몸 빛은 등쪽은 회청색이고 배쪽은 은백색이다. 몸길이는 80㎝ 정도이다.

숭어는 우리 나라 전 연해에 분포하며, 해수뿐만 아니라 기수(汽水) 및 담수에도 서식한다. 치어는 담수역과 기수역에서 살다가 몸길이가 25㎝ 내외가 되면 바다로 나가며 4월에 바다의 얕은 곳으로 오고 1월에는 하천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숭어를 치어라고 하였고 그 명칭은 일찍부터 문헌에 등장한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 海東繹史≫에 의하면 발해가 729년에 치어를 당나라에 조공한 일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지리서에는 이를 수어(秀魚) 또는 수어(水魚)라고 기재하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숭어라고도 썼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수어(水魚)가 경상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수어(秀魚)가 전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기재된 빈도수도 매우 높다. 이는 당시 여러 곳에서 숭어를 어획하고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의 토공조에는 건수어(乾水魚)가 많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오늘날과는 달리 건제품으로 가공하여 소비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 芝峰類說≫에는 수어(秀魚)라는 이름의 유래가 언급되어 있다. 옛날에 중국 사신이 와서 숭어를 먹어보고 그 속명을 물었는데 역관(譯官)이 대답하기를 수어(水魚)라고 하자 그 사신이 웃었으므로 역관 이화종(李和宗)이 나아가 말하기를 숭어는 물고기 중에서 빼어난 것이므로 그 이름이 수어(水魚)가 아니고 수어(秀魚)라고 하자 사신이 이를 납득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 책에는 ≪양생서 養生書≫를 인용하여 “숭어는 진흙을 먹어 토기(土氣)가 있으므로 비위(脾胃)를 보한다.”고도 하였다. 광해군 때에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는 “수어(水魚)는 서해에 모두 있는데 경강(京江 : 뚝섬으로부터 양화도에 이르는 한강의 일대)의 것이 가장 좋으며, 나주(羅州)에서 잡은 것은 극히 크고 평양에서 잡은 것은 언 것이 좋다.”고 하였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 玆山魚譜≫에는 숭어의 모양에서부터 성질·어획·이명 등에 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되어 있다.

“큰 것은 5∼6자이며 몸은 둥글고 검다. 눈은 작고 노란빛을 띠며, 머리는 편평하고 배는 희다. 성질은 의심이 많아 화를 피할 때 민첩하다. 또 잘 헤엄치고 잘 뛴다. 사람의 그림자를 보면 급히 뛰어 달아난다.

물이 탁하지 않으면 여태까지 낚시를 문 적이 없다. 물이 맑으면 그물이 10보쯤 떨어져 있어도 놀라서 움직이고 그물 안에 들었다 하더라도 그물에서 곧잘 뛰어나간다.

그물이 뒤에 있을 때는 물 기슭으로 다가와 진흙 속에 엎드려 있고 물 속으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물에 걸려도 몸을 흙 속에 묻고 한 눈으로 동정을 살핀다.

맛은 좋고 짙으며 물고기 중에서 제일이다. 이를 잡는 시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3, 4월에 산란하므로 이때 그물로 잡는 사람이 많다. 개펄 진흙이나 흐린 물이 아니면 잡지 못한다. 흑산도 바다에도 간혹 있으나 잡을 수가 없다.

그 작은 것을 속칭 등기리(登其里)라 하고 가장 어린 것을 속칭 모치(毛峙)라고 한다(毛當이라 부르기도 한고 또 毛將이라고도 부른다).”

徐有榘의 ≪난호어목지 蘭湖漁牧志≫에는 숭어를 치(緇)라고 쓰고 한글로 ‘슝어’라 하였다. 그리고 이름에 대하여 빛깔이 치흑색(緇黑色)이므로 치자(緇字)를 따라 지었다고 하였고, 월(粤 : 중국의 광둥·광시 지방)의 사람은 자어(子魚)라고 부르는데 그 새끼가 살찌고 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우리 나라에서는 속칭 수어(秀魚)라고 하는데 그 모양이 길고 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숭어는 성질이 진흙을 먹기를 좋아하므로 숭어를 먹으면 비장(脾臟)에 좋고, 강에서 나는 물고기 중에서 제일 크고 맛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알을 햇빛에 말리면 빛깔이 호박(琥珀) 같은데, 호민(豪民)·귀인(貴人)이 이를 진미로 삼으며 이를 속칭 건란(乾卵)이라 한다고 하였다.

잡식성인 숭어는 실제로 진흙 속의 유기물이나 각종 조류(藻類)를 진흙과 함께 먹는다. 그리고 숭어가 약이 된다는 것도 본초학(本草學)이 일찍부터 밝히고 있는 바다.

1433년(세종 15)에 완성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에는 치어의 향명(鄕名)을 수어(水魚)라 하고 다음과 같이 그 약성(藥性)을 설명하고 있다. “맛이 감(甘)하고 평(平)하고 무독하다. 위를 열고 오장을 통리(通利)하며 오래 먹으면 사람을 비건(肥健)하게 한다. 이 물고기는 진흙을 먹기 때문에 백약(百藥)에 기(忌)하지 않는다.”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에도 이와 거의 같게 기술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숭어자원이 풍부하였다. ≪조선통어사정 朝鮮通漁事情≫에 의하면 19세기 말에 한 일본인이 한번 그물을 쳐서 숭어 6,000여 마리를 잡아 부산에서 팔았는데 그 크기는 35∼60㎝였다고 한다.

당시 우리 나라 사람들은 투망(投網)·자망(刺網)·지인망(地引網)·어전(漁箭) 등으로 잡았고 일본인은 건간망(建干網)·선자망(旋刺網) 및 석조망(石繰網) 등으로 잡았다. 일제시대에는 부망(敷網)·선자망·숭어건착망(崇魚巾着網)·석조망·6소장망(六艘張網) 등으로 잡았다.

오늘날에는 유자망(流刺網)·정치망(定置網) 등으로 많이 잡는다. 어획량은 일제강점기에 연간 최고 약 4,200M/T(1929)이 잡힌 일이 있었고, 최근에는 연간 6,000∼8,000M/T이 어획되고 있다.

선도가 높은 선어와 활어(活魚)는 생선회로 애용되고 있으며 그 값도 비싸다. 1992년에는 5,166M/T, 1997년에는 5,564M/T이 어획되고, 양식으로는 1992년에 453M/T, 1997년에는 178M/T이 어획되었다.

참고문헌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한국담수산어류』(김인배, 태화출판사, 1974)
『한국어도보』(정문기, 일지사, 1977)
『해양수산통계연보』(해양수산부, 1998)
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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