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넓고 뒤가 좁은 반두와 같이 생긴 어망을 뱃머리[船首]에 달고 다니면서 조류를 따라 오는 새우 또는 뱅어·조기새끼 및 기타 잡어를 잡는 데 쓰였으며, 재료로는 삼실[麻絲]을 사용하였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이를 ‘차망(杈網)’이라 소개하고, ‘횃배’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현재의 어법(漁法)으로 보아서는 어망을 물속에 펼쳐두고 그 위에 어류가 올라오는 기회를 보아 어망을 끌어올리는 일종의 부망(敷網)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남해에서는 완도(莞島)에 이르는 남해안의 여러 내만(內灣)에서 주로 새우를 잡았으며, 여수만·광양만·득량만은 궁선어업이 가장 성한 곳이었다. 평안북도의 압록강하류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그 곳에서는 뱅어를 잡았다고 한다.
그 뒤 민족항일기까지도 상당히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42년 말 궁선망 통수는 481통으로 목포·진도·영산강하구 등지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어망의 망구(網口)가 해저에 닿을 정도의 얕은 어장에서 주로 사용하였으며, 전어나 숭어와 같이 바닷물과 민물이 합치는 곳으로 오는 어류도 잡았다.
그리고 양망(揚網 : 그물을 치거나 걷음.)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양망대를 설치하였으며, 조업에 있어서는 어부 두 사람이 약 10분간씩 교대로 양망하였으며, 능률적인 어망의 발달과 자원의 감소로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