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설에는 한 일본인이 1899년에 우리 나라 연안에서 안강망을 시용(試用)하였으나 실패했고, 이듬해에 비로소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또 1898년에 한 일본 어업 경영자가 전라남도 칠산탄(七山灘)에서 안강망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안강망은 우리 나라 재래식 어망인 중선망(中船網)과 어법이 유사하다. 따라서 이것이 처음 보급될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를 ‘일중선(日中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추형의 길다란 낭망(囊網)을 사용하는 점이 중선망과 같으나 중선망은 어망을 어선에 달고 다니는 데 반하여 안강망은 어선이 어장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 어망을 해저에 설치한다.
이것은 처음에 서해안의 조기어업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어망은 우리 나라 재래식 어망에 비하여 능률적이었으므로, 우리 나라 어민들이 이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것은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이 어망은 서해안의 자연적 조건에 적합하고, 구조가 간단하여 취급이 간편할 뿐만 아니라 소자본으로도 착업(着業)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또 중선망을 사용하고 있던 우리 나라 어민들이 그 기술을 쉽게 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급속하게 보급된 한 원인이었다.
1911년 말 통계를 보면 안강망은 한국인 179통, 일본인 407통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2년 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2,597통, 일본인 611통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훨씬 많이 안강망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1942년 말에는 안강망 총수가 7,748통으로 늘어났다. 이때 중선망은 893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안강망 어업은 그 어법이 계속 개량되었고, 그 어선도 이전의 범선 일색에서 기선(機船)을 사용하는 것이 출현하여 증가해 갔다. 이에 따라 그 어장도 이전의 내만 또는 육지 가까운 연안에서 근해를 향하여 확대되어 갔다. 조기떼를 따라 안강망 어선이 북상 이동할 때에는 파시(波市)를 이루었고, 상인도 함께 이동하였다.
어망의 길이는 육상에서 당겼을 때 100m가 훨씬 넘었다. 이는 수중에서 전개되었을 때도 100m 가까이 되는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어구·어법을 개량하면서 계속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망은 합성섬유를 사용함으로써 혁신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망구(網口) 전개장치인 숫해 및 암해의 자재를 맹종죽(孟宗竹)과 참나무와 가시나무에서 철제파이프로 대체하는 시험이 성공을 거두어 어구 개량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0년을 전후하여 안강망 어선 수는 2,000척이 넘었다. 어구·어법 개량시험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범포(帆布:돛을 만드는 포목)를 이용한 전개장치를 개발하는 시험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안강망은 규모가 큰 근해 안강망과 규모가 작은 연안 안강망의 2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주어획물은 갈치·쥐치·젓새우 등 다양하며, 조기는 잘 잡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