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문류집해(圓宗文類集解)』는 의천(義天, 1055∼1101)의 『원종문류(圓宗文類)』를 승려 확심(廓心)이 해석한 것으로, 현재 권중(卷中)만 남아 있으며 원래는 상중하 3권 구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의 이마니시[今西]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원종문류집해(圓宗文類集解)』는 의천(義天, 1055∼1101)의 『원종문류(圓宗文類)』를 승려 확심(廓心)이 해석한 것으로, 현재 권중(卷中)만 남아 있으며 원래는 상중하 3권 구성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学] 도서관의 이마니시[今西] 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원종문류』는 화엄종의 문헌 중 의천(義天)이 긴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전체 22권의 분량으로 모은 것이다. 의천은 장소(章疏)를 통하여 경전을 이해하고 진리를 깨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찬술(撰述)하였고, 지엄(智儼) · 법장(法藏) · 징관(澄觀) 등 중국 정통 화엄 조사들의 문류(文類)를 중심으로 편찬하였다. 확심(廓心)은 의천계의 문도(門徒)이다. 확심이 책의 권수(卷首)에 ‘해동태백산전교사문확심집(海東太白山傳敎沙門廓心集)’이라고 밝히고 있어 그가 태백산 각화사(覺華寺)의 승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181년(명종 11)에 최선(崔詵)이 찬술한 『두산용수사개창기(龍頭山龍壽寺開創記)』에는 확심이 1173년(명종 3) 스승 석윤(釋胤)의 뒤를 이어 용수사의 제3대 주지가 되어 1181년까지 재임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석윤과 확심은 각화사와 가까운 지역에서 화엄법회(華嚴法會)를 개설하여 화엄교리를 배우고 널리 유포하고자 하였다. 『원종문류집해』의 저술 시기와 관련하여 권중 첫머리에 ‘해동태백산전교사문확심집(海東太伯山傳敎沙門廓心集)’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위에서 생애를 정리한 바에 따르면 확심이 태백산 각화사에서 머물다가 1173년 그의 스승 석윤이 입적하자 용수사의 불사에 전념하게 되어 1181년까지는 용수사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선행 연구들에서는 『원종문류집해』가 1173년 이전에 확심의 각화사 시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러한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되지만 1181년 『용두산용수사개창기』 완성 이후 확심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1181년 이후에 다시 각화사로 돌아가서 『원종문류집해』를 저술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원종문류집해』는 하나의 원전(原典)에 대한 다수의 주석서로 요문(要門)을 모아서 한 책으로 묶은 것이다. 『원종문류집해』는 3권 가운데 현재 권중만이 남아 있어 『원종문류』의 어느 부분에 대한 집해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은 종요의(宗要義) · 초회리지의(初會理智義) · 국토해의(國土解義) · 종취의(宗趣義)로 나누어 집해되어 있였다. 집해는 법장의 『탐현기(探玄記)』와 징관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광범위하게 활용하였다. 확심은 의천의 화엄사상을 반영한 『원종문류』에 대한 『원종문류집해』를 통해 의천의 화엄사상을 계승하였다.
『원종문류집해』는 『원종문류』에 대한 종합적 연구의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예컨대 법장과 징관의 인과이분(因果二分)에 대한 해석을 회통(會通)시켜 일체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원효의 저술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 균여 계통의 화엄보다 원효의 화쟁의 입장과 의천이 추구한 종합 불교를 계승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종문류』 22권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와 함께 그 가치를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