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태조(太祖) 때의 공신(功臣)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이다.
1178년(명종 8) 공부낭중(工部郎中)으로 흥화도찰방사(興化道察訪使)를 겸임하였다. 1180년 우사간(右司諫)으로 명종(明宗)의 아우인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冲曦)가 궁중에서 궁녀들과 음란한 행위를 한다고 탄핵하였다가 파면되었다. 1186년 판장작감(判將作監)이 되어 대사성(大司成) 황보 탁(皇甫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지명(李知命)과 함께 양공준(梁公俊) 등 22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92년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서 이부상서 정국함(鄭國儉) 등과 함께 『증속자치통감(增續資治通鑑)』을 교정하고, 이어 『태평어람(太平御覽)』을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1194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지공거(知貢擧)인 추밀원사(樞密院使) 최유가(崔瑜賈)와 함께 진사(進士)를 선발하고 김군수(金君綬) 등 31인에게 급제를 내렸다. 1197년(신종 즉위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1200년 수태부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傅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에 특진되고 이듬해 개부의동삼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上柱國)이 되었다. 1202년 식목도감사(式目都監事)로 활동하였으며, 1204년 당시의 집정자였던 최충헌(崔忠獻)과 함께 신종(神宗)의 선위(禪位)를 의논하였다. 1209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죽었다.
희종(熙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