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눌(最訥, 1717~1790)은 조선 후기 송광사(松廣寺)를 본거지로 한 부휴계(浮休系)의 적전으로 화엄학자이자 전라남도 해남 표충사(表忠祠) 원장을 역임한 승려이다. 스승은 풍암 세찰(楓巖世察)이다. 화엄을 비롯한 교학에 정통하여 『화엄품목(華嚴品目)』, 『제경회요(諸經會要)』, 『묵암집(黙庵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대둔사(大芚寺)의 연담 유일(蓮潭有一)과 부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같은지 다른지의 문제를 둘러싼 심성 논쟁을 펼쳤다.
최눌(最訥, 1717~1790)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다. 최눌은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현 전라남도 고흥군) 장사촌(長沙村) 출신이다. 호는 묵암(默庵), 법명(法名)은 최눌(最訥), 자는 이식(耳食)이다. 부휴계(浮休系)의 적전 풍암 세찰(楓巖世察, 1688∼1767)의 법맥을 이었다.
최눌은 4세 때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 응계촌(鷹鷄村)으로 이사를 하였고, 어려서부터 글 공부를 좋아했다고 한다. 14세에 징광사(澄光寺)의 돈정(頓淨)에게 출가하였고, 18세에 만리(萬里)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9세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 들어가 풍암 세찰에게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4~5년 동안 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에 부휴계의 교학 종장인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와 편양파(鞭羊派)의 호암 체정(虎岩體淨, 1687∼1748), 상월 새봉(霜月璽篈, 1687∼1767) 등 이름난 학승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1743년(영조 19) 스승 풍암 세찰이 주석하던 순천 대광사(大光寺) 영천암(靈天庵)에서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그 뒤 강석(講席)을 펼쳐서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고, 자신이 강학한 내용을 모아 10여 종의 책을 지었다고 한다.
1761년 조사인 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의 탑을 송광사 부도전에 세웠고, 1770년에는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이 되었다. 1790년 조계산 보조암(普照庵)에서 나이 73세, 법랍(法臘) 55세로 입적하였으며, 보조암에 진영(眞影)이 걸리고 송광사 부도전에 탑이 세워졌다.
법맥 상의 적전(嫡傳)은 환해 법린(幻海法璘)이고, 선은 와월 교평(臥月敎萍)에게, 교학은 봉봉(鳳峯)과 성봉(聖峯) 등에게 전했다고 한다.
묵암 최눌은 선과 교에 두루 능통하였지만 특히 화엄 교학에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또 유학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에도 밝았다. 그는 승려 교육 과정의 최고 단계인 대교과의 『화엄경(華嚴經)』과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평생 강학에 매진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최눌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澄觀)의 『화엄소초(華嚴疏鈔)』에 대한 과문(科文)인 『화엄과도(華嚴科圖)』,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문답으로 정리한 『제경문답(諸經問答)』, 여러 불교 경전의 요체를 그림으로 나타낸 『반착회요(盤錯會要)』, 시문집인 『묵암집(黙庵集)』 3권 등을 저술했다. 『화엄과도』는 『화엄품목(華嚴品目)』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었으며, 『제경문답』과 『반착회요』는 『제경회요(諸經會要)』로 합편되어 유통되었다. 최눌은 『제경회요』의 「불조종파도(佛祖宗派圖)」에서 임제태고법통을 내세우면서 부휴계의 계파적 정통성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 불교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묵암집』에는 조선 영조 대에 3정승을 역임한 김상복(金相福)을 비롯한 고위 관료 및 저명한 유학자와 주고받은 시와 편지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일본 승려에게 보낸 시도 있다. 또한 당시 승려들에게 큰 부담이었던 종이 공납의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국왕 영조에게 올린 상소문도 들어있다.
한편 최눌은 호암 체정의 제자이자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12대 종사인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과 불교 심성에 관한 논쟁을 펼친 후 1775년에 『심성론(心性論)』 3권을 펴냈다. 그는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냈고, 유일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게 있지만 본래는 하나’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10년 후 최눌의 제자인 화일(華日)과 경현(敬賢)은 지리산 천은사(泉隱寺) 상선암(上禪庵)에서 이 책이 쟁론의 화근이 될까 우려하여 불태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최눌이 쓴 『심성론』은 전해지지 않고 유일이 쓴 『심성론』 「서문」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