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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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불교
의례·행사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불교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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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경은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불교 의식이다. 초기의 사경은 불경을 널리 보급시키는 수단이었으나, 목판본이 유행하면서 ‘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고려 시대의 사경은 실용성보다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된 화려한 장식경이 주류를 이루었다. 사경의 형태는 권자본(卷子本)과 절본(折本)이 있는데 보통 절본이 많다. 겉표지에는 금은니로 보상당초문을 그리고, 안표지에는 경전의 내용을 풀이하여 그림으로 그렸다. 금선으로 가늘게 구획을 나누고, 글씨는 은자로 썼다. 사경에 쓰인 서체는 당사경서체, 신라경서체, 구양순의 해서체를 사용했다.

목차
정의
불교 경전을 베껴 쓰는 불교의식.
내용

사경은 신앙적 의미를 지닌 공덕경(功德經)이다. 초기의 사경은 불교경전을 서사(書寫)하는 것을 말한다. 사경은 첫째, 불경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둘째 승려가 독송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셋째 서사의 공덕을 위한 목적에서 제작되었다. 즉 불경을 널리 보급시키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의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함께 불경을 보내온 사실을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공식적인 불교수용과 더불어 사경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의 사경은 4세기 말부터 불교경전의 ‘광선유포(廣宣流布)’라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목판본이 개판된 이후부터 목판본의 유행으로 사경의 목적을 상실하게 되었다.

8세기 중엽부터 10세기를 전후해서 널리 보급된 목판본이 대량 생산되어 경전의 유통보급의 실용적인 면이 줄어든 반면에 ‘서사의 공덕’이라는 신앙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다. 경전의 서사는 경을 보급시키는 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구실을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권43이다. 이 경은 장식경 또는 공덕경의 의미를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으로 2축 중 1축만 공개되어 1979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사경의 겉표지 그림과 안표지 그림은 자지(紫紙)에 금은니(金銀泥)로 그림을 그렸고, 경문에서는 흰 닥나무 종이에 묵자로 글을 쓴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사경이 유통보급이라는 실용적인 면에서 서사의 공덕을 강조한 신앙적인 불사로 옮겨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사경은 실용성보다는 신앙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경의 제작은 국왕발원에 의한 금자원 · 은자원 등에서 사성되었는데, 국가의 어려움을 불력으로 구원한다는 뜻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특히 1236년(고종 23)에 몽고침입을 불력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팔만대장경 주조사업에 착수하고, 그 사업을 위해 강화도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세운 뒤에 많은 사경을 제작하게 되었다. 또한 귀족들 사이에서도 가문의 영달을 위해서 많이 사성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사경은 독특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일반적으로 경을 감싸주는 겉표지 그림에는 금은니로 보상당초문을, 안표지 그림에는 경전의 내용을 쉽게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금니로 각각 그려져 있다. 경문은 금선으로 가늘게 구획하여 은자로 썼다. 둘째, 사경의 형상은 권자본(卷子本)과 절본(折本)이 있는데 보통 절본이 많이 보인다. 절본인 경우 크기는 너비가 31㎝, 길이가 11㎝로 1면에 6행을 구획하여 1행에 17자로 썼다.

셋째, 용지는 동을 부식시킨 녹물에 닥나무종이를 담가 만든 짙은 감색종이가 많이 쓰이고 그 밖에 자지 · 홍지 · 갈지 · 마지 등도 이따금 쓰인다. 넷째, 『화엄경』『법화경』의 2대경전 및 『아미타경』 · 『금강반야바라밀경』 · 『부모은중경』 등이 많이 서사되었다. 다섯째, 자기 자신이 경전을 서사하는 경우, 전문사경승이 서사하는 경우, 그리고 사원에서 보시하기 위해서 서사한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여섯째, 사경이 만들어지는 장소는 국왕발원의 국가전담기구인 금자원이나 은자원에서 제작되거나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과 일족의 영화를 위해 사원에서 제작되었다. 일곱째, 고려사경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화려한 장식경이라는 점이다.

여덟째, 충렬왕 이후에 원나라에서 사경승(寫經僧)과 경지(經紙)에 대하여 요구한 것을 여러 문헌과 비문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려사경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경에 쓰여진 서체에서도 특징을 엿볼 수 있는데, 당나라 명승인 전문사경승이 정성 들여 쓴 단아한 필치와 당사경서체를 유입하여 한국적으로 소화시킨 신라경서체, 구양순의 해서체를 모본으로 한 고려의 독자적인 서체를 말한다.

문인서예가들의 감상 위주 또는 실용적인 서체나 서사의 공덕을 강조한 사경승이 쓴 경서체와는 근본적인 목적이 다르고, 해서체로 쓰여진 금석문과 비교해 보면 거의 같은 서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사경은 본래 광선유포의 서사경전 구실에서 탈피하여 불상 복장이나 탑 사리 내용물이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 공덕경이었다.

고려사경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006년(목종 9)에 만든 『감지금자대보적경(紺紙金字大寶積經)』을 비롯하여, 1982년 보물로 지정된 1280년(충렬왕 5)의 『감지은자보살선계경』 권8, 1324년(충숙왕 11)에 사성된 『감지은자대방광불화엄경(紺紙銀字大方廣佛華嚴經)』 권40 · 41, 1322년(공민왕 22)에 사성된 1976년 국보로 지정된 『상지은자묘법연화경』 제7권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14세기에 들어서면 사경 중에서 『법화경』이 집중적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경향은 『법화경』 자체가 갖고 있는 경탑사상(經塔思想)과 법화경신앙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 예는 남계원칠층석탑출토(南溪院七層石塔出土)의 『감지금자묘법연화경(紺紙金字妙法蓮華經)』 제7권인데, 이 탑 안에 사리 대신에 『법화경』을 봉안함으로써 경탑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 사경은 8권본으로 경 자체가 법화경신앙과 경탑사상을 보여 준다. 경전 각권 첫머리에는 보탑을 주로 그리고 그 밖에 석가나 관음도가 있다. 14세기 후반의 작품인 이 『법화경』은 법화경신앙과 경탑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절본형태나 글씨체, 겉표지 그림 등에서 14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사경의 이와 같은 전통을 이어 훌륭한 사경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초기 이후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은 금자사경 또는 은자사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한국사경목록」(황수영, 『불교미술』 7집, 동국대학교박물관, 1983)
「사경의 역사」(황수영, 『불교미술』 7집, 동국대학교박물관, 1983)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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