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은 불교의 교리를 밝혀 놓은 전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나 부처의 제자가 설한 교의를 적은 서적인 경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교단의 규율을 정한 율과 철학적 이론을 전개한 논, 경·율·논에 고승 논사들이 주석을 붙인 저술까지 포함한다. 일체경·대장경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의 불경을 말한다. 석가모니 열반 직후 설법을 정리하여 전했으며 처음에는 암송으로 전하다가 점차 문자화되었다. 대체로 5세기경까지 주요 경전들이 완성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한역된 불경이 전해졌는데 주로 대승불교의 학파들에 의해 성립된 것들이다.
경(經)은 범어 수트라(Sutra)를 의역한 말로서, 계경(契經) · 정경(正經) · 관경(貫經) 등으로도 번역된다. 수트라는 원래 실 또는 끈을 뜻하였는데, 뒤에 자[尺]로 사용하는 끈, 교훈 · 교리 · 금언(金言) 등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중국에 와서 불변의 진리를 뜻하는 경(經)으로 의역되었다. 좁은 의미에서 볼 때 불경은 부처님, 드물게는 부처님의 제자가 설한 교의(敎義)를 적은 서적을 말한다.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짧은 것은 수십 단어, 긴 것은 수천 쪽에 이르는 것도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교단(敎團)의 규율을 규정한 율(律)과 철학적 이론을 전개한 논(論), 고승들이 이들 경 · 율 · 논의 삼장(三藏)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붙인 저술들까지를 모두 포함한 불교성전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일체경(一切經)이라든가 대장경(大藏經)이라고 하면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불교 경전은 문체 및 기술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12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12분교(分敎)라고 한다. 이 분류법은 불경의 최초 편찬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 12가지는 경 · 고기송(孤起頌) · 중송(重頌) · 무문자설(無問自說) · 미증유법(未曾有法) · 여시어(如是語) · 인연(因緣) · 비유(譬喩) · 본생(本生) · 수기(授記) · 논의(論議) · 방광(方廣) 등이다.
① 경은 사상적으로 그 뜻을 완전히 갖춘 경문을 말한다. 단순한 이야기 또는 비유만의 서술이 아니라 삼법인(三法印) 등의 사상적인 내용을 완전히 표현한 경문을 경이라고 한다.
② 고기송은 게송(偈頌) 등과 같이 운(韻)을 붙인 시체(詩體)의 형식을 취한다.
산문체로 된 경전의 1절 또는 전체의 끝부분에 아름다운 게송으로 묘한 뜻을 밝힌 것이 이것이지만, 본문을 거듭 읊는 중송이 아니라 본문과는 관계없이 노래한 운문을 말한다.
③ 중송은 고기송과는 대조적으로 운을 붙이지 않은 시체 형식을 취하고 있고, 산문으로 된 본문의 뜻을 거듭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④ 무문자설은 일반적인 경전에서 부처님이 제자나 신도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의 수준에 맞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과는 달리, 부처님이 체험한 감격을 누구의 질문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설한 경전을 뜻한다.
⑤ 미증유법은 경전 가운데 불가사의한 일을 말한 부분이다. 범부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성자 특유의 심경이나 정신적 기적 등을 설한 부분을 말한다.
⑥ 여시어는 경전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如是我聞].”라고 적혀 있는 것을 말한다. 이 ‘여시아문’이라는 말 속에는 부처님이 이와 같이 설한 것이므로 그대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⑦ 인연은 어떤 경전을 설하게 된 사정이나 동기 등을 서술한 부분을 말한다.
⑧ 비유는 경전 가운데서 비유나 우언(寓言)으로 교리를 해석하고 설명한 부분을 말한다. 불교경전에는 이 비유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비유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된 경전도 있다.
⑨ 본생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적은 경문으로, 부처님의 전생에 수행하였던 이야기 등을 담고 있다.
⑩ 수기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 세상에 어떤 환경에서 성불하리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한 경문의 부분으로, 보통 문답식의 대화를 전개하다가 최후에 부처님이 인가를 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⑪ 논의는 해석하고 논술한 연구논문 형식의 경문을 말하는데, 부처님이 논의하고 문답하여 온갖 법의 내용을 명백히 밝힌 부분을 가리킨다.
⑫ 방광은 문답의 형식으로 전개되면서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더 깊고 더 넓게 확대하고 심화시켜가는 철학적 내용의 성격을 띤 경문을 말한다.
초기의 경전은 이 12가지 중에서 보통 3개 이내를 취하여 하나의 경전을 구성하였으며, 후기의 경전 중에는 12가지를 모두 취한 경우도 있었다.
한 경전의 일반적인 구성 형식은 서분(序分) · 정종분(正宗分) · 유통분(流通分)의 3단으로 되어 있는 삼분법(三分法)을 따르고 있다. 서분은 경의 첫머리의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 이하 그 경을 설한 때와 장소, 설법의 대상 등 일체의 주변 여건을 서술한 부분이다. 정종분은 부처님의 설법을 서술한 중심부분이고, 유통분은 경의 끝부분에 그 설법을 들은 대중의 감격이나 계발의 정도, 그리고 장래에 이 경을 읽는 사람들의 이익이나 공덕, 그 경의 이름 등을 기록한 부분이다.
단편의 경전은 정종분만 있는 것도 있고, 서분과 유통분이 극히 간단한 것도 있다. 그러나 장편의 경전은 반드시 이 삼분을 구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분과 유통분이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서분과 유통분은 부처님의 설법내용이 아니라 편찬한 사람의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교학자들은 이 서분의 기술내용에 의해서 그 경전의 사상, 내용의 깊고 얕음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경전이 최초로 성립된 것은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 칠엽굴(七葉窟)에서 거행된 제1 결집(結集)을 통해서였다. 교단 제일의 마하가섭을 우두머리로 하여 500여 명의 장로 비구가 모여 편찬하였는데, 먼저 우바리(Upali)가 율(律)을 송하고, 다음에 아난다가 법(法)을 송하면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협의하여 불설(佛說)임을 승인한 것이다.
7개월이 소요된 이 결집에서 장로들은 석가모니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어떠한 설법을 하고, 들은 사람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정을 상의하여 이것을 석가모니가 설법한 형식으로 전송하였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경전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로 시작하여,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더라[歡喜奉行].”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제2결집은 불멸(佛滅) 후 약 100년경에 행하여졌다. 베살리성에서 700명의 비구가 모여 계율을 바로잡기 위해서 결집을 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경전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정리된 경전을 각각 암송하였다가 그 다음 제자에게 구전(口傳)하는 이야기 경전이었다. 제3결집은 다시 100년 뒤에 아소카(Asoka)왕의 명에 의하여 제수(帝須)를 우두머리로 한 1,000명의 승려가 화씨 성(華氏城)에서 행한 결집으로, 이때 비로소 문자화되었다.
제4결집은 2세기 전반 대월지국(大月支國) 카니쇼카왕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불교 여러 부파들의 이설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삼장에 관한 주석서를 결집한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불설 편찬의 범주에서 제외시키기도 한다.
그 뒤에도 불경의 성립은 계속되어 5세기경까지는 대개의 중요한 대승경전들이 출현하였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성립하기 시작하여 5세기경에 일단락을 본 대승경전으로는 『반야경』 · 『법화경』 ·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 『유마경(維摩經)』 · 『승만경(勝鬘經)』 · 『해심밀경(解深密經)』 · 『열반경』 · 『화엄경』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경전은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됨에 따라 우리나라 불교의 각 종파별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되어 독특한 사상 및 신앙을 이루는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율은 대개가 부처님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율장이 최초로 성립된 것은 석가모니의 열반 직후의 제1결집을 통해서였고, 이때 모여진 율이 그 뒤 차차 정리되고 조직되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는 율장이 되었다. 율장의 조직은 금지조항에 해당하는 지지계(止持戒)와 준수사항에 해당하는 작지계(作持戒)로 대별된다.
지지계는 비구(比丘)의 250계, 비구니(比丘尼)의 348계 등을 가리킨다. 이들 계의 조목의 수는 부파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이를 분류하는 대강(大綱)은 모든 부파에 공통되어 있다. 율장에는 이들 계율에 대한 분별 주석(註釋)이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경분별(經分別)이라 한다.
또 작지계는 출가교단의 생활규정이다. 출가수계(出家受戒) · 포살(布薩) · 안거(安居) · 자자(自資) 등 의식주에 관한 여러 규정을 모아 그것들을 주석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건도부(健度部)라고 한다. 이들 두 부분 외에도 율장에는 후세의 부록인 부수(附隨)가 들어 있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율장에는 남방상좌부(南方上座部)의 파알리율, 화지부(化地部)의 오분율(五分律), 법장부(法藏部)의 사분율(四分律), 대중부(大衆部)의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십송률(十誦律), 근본설일체유부(根本說一切有部)의 유부신율(有部新律)과 이에 대한 티베트역 율장이 있다.
이들 중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사분율을 많이 따르고 있는데, 그 까닭은 당나라 때 남산도선(南山道宣)이 이 사분율에 의해서 계율의 규정을 만들고 사분율종(四分律宗)을 만듦으로써 널리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논은 불교 철학자들이 저술한 교의강요서(敎義綱要書)이다. 논을 저술한 사람을 논사(論師)라고 하는데, 인도 불교사에 있어서 많은 논사들이 배출되었으며, 그들이 지은 불교철학서를 통칭하여 논이라고 한다.
논장에 속하는 많은 논서들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서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논을 구분할 수 있고, 학파별로는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經量部), 대승불교의 중관학파(中觀學派)와 유식학파(唯識學派), 그리고 여래장사상계(如來藏思想系)의 논들로 구별할 수 있다.
지역적으로 보면 스리랑카 상좌부의 전통을 보존한 남방불교에서는 논장에 칠론(七論)을 담고 있고, 인도불교를 수용하여 방대한 대장경(大藏經)을 만든 북방불교의 중국과 한국 · 일본에서는 논을 대승론과 소승론으로 양분하는 전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논서는 대부분이 대승불교의 학파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중관파의 것으로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 · 『십이문론(十二門論)』 · 『대지도론(大智度論)』과 제바(提婆)의 『백론(百論)』이 있다. 유가파의 것으로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 『섭대승론(攝大乘論)』 · 『대승장엄경론(大乘藏嚴經論)』 · 『유식론(唯識論)』 ·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이 있으며, 여래장 계통으로는 『불성론(佛性論)』 · 『보성론(寶性論)』 등과 이 양자를 종합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 있다.
다만, 우리나라 불교학연구의 초기에는 소승불교의 대표로 되어 있는 설일체유부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 『구사론(俱舍論)』 등과 경부(經部)의 『성실론(成實論)』이 다소 연구되었다.
인도에서 성립된 경전은 서역에 전해지고 다시 중국에 수입되었다. 그리고 인도나 서역의 언어 문자로 씌어진 경전은 중국 사람이 알기 쉽게 한역하는 것이 최상의 과제로 부각되었으며, 초기의 불교는 이 한역에 치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경전번역사업이 활발하였다.
최초로 한역을 시작한 승려는 후한시대에 중국으로 들어온 안식국(安息國)의 안세고(安世高)와 지루가참(支婁迦懺)이었다. 이 두 사람이 중국에 온 것은 2세기의 후반으로 그들이 번역하는 데 얼마나 힘을 기울였는가 하는 것은 현존하는 그들의 번역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인도인이나 서역인들과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중국인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불교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외래의 역경가들 덕택이었다.
이들은 특히 『반야경』 계통의 대승경전을 많이 번역하였고, 188년에는 『유마경』을, 그 다음에는 아미타신앙의 경전과 『법화경』 등을 차례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이밖에도 후한시대의 역경자로는 축법호(竺法護) · 안현(安玄) · 축대력(竺大力) · 담과(曇果) · 엄불조(嚴佛調) 등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번역은 역어(譯語)가 각각 다르고 역문의 형식이 고르지 않으며, 음사어(音寫語)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매우 난해하고 딱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함은 차차 개선되어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현장(玄奘)에 이르러 획기적인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401년에 중국으로 들어와서 13년 동안 한역작업을 계속하였던 구마라습은 74부 384권의 불경을 유려한 문장으로 번역하였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중론』 · 『대지도론』 · 『마하반야경』 · 『아미타경』 · 『법화경』 등을 번역하였는데, 이들은 그 뒤에도 여러 번 번역되었으나 현재까지 구마라습의 번역을 널리 사용하고 있다.
현장은 633년에 인도로 가서 돌아올 때 650권의 범어로 된 불서를 가지고 와서 648년부터 대자은사(大慈恩寺)의 역경원에서 번역을 시작하였다. 19년 동안의 번역끝에 600권의 『대반야경』을 비롯하여 『유가사지론』 · 『대비바사론』 · 『구사론』 · 『성유식론』 · 『섭대승론』 등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습과 현장의 번역은 특히 우리나라 불교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번역서는 거의가 우리나라에 곧바로 전하여졌다.
우리나라에 불경이 들어온 것은 삼국이 불교를 공인함과 동시에 전래되었고, 특히 중국에서의 한역(漢譯)이 이루어지면 거의 즉시에 유입되어 연구되었다. 이 경전들은 외국의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찾을 때, 또는 우리나라의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왔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하면서 불경을 전하였고, 395년에 진나라 승려 담시(曇始)가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와서 고구려 불교 전개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때 가지고 온 경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구려에서 최초로 불경의 명칭이 보이는 것은 의연(義淵)이 576년에 전제(前齊)의 서울인 업(鄴)에 가서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을 연구했다고 한 것이다.
또한 고승 승랑(僧朗)이 『대반열반경집해(大般涅槃經集解)』를 저술하였고, 보장왕 때의 고승 보덕(普德)이 『열반경』의 교학을 크게 펼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열반경』을 비롯한 여러 대승경전이 이미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율서와 논서의 전래 또한 불교의 전래와 동시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율에 관해서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395년에 담시가 율을 가지고 고구려로 온 뒤 수계(受戒)를 하고 불제자가 되는 길이 트이게 되었다고 한 데서 유래한다. 논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6세기 초기에 중국에 들어가서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여 신삼론종(新三論宗)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개척한 승랑에게서 찾을 수 있다.
승랑 이후 고구려에서는 『중론』 · 『십이문론』 · 『광백론(廣白論)』으로 구성된 삼론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625년(영류왕 8)에는 고구려 승려 혜관(慧灌)에 의해 이 삼론이 일본에서 강의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고구려 불교에서 논서에 관해서 언급한 것은 의연이 전제로 가서 대승논서를 배우고 왔다는 기록이다. 이 논서들 중에는 『십지경론』 · 『대지도론』 · 『금강반야론』 등이 포함되고 있는데, 이 논서들은 나중에 신라의 학승(學僧)들이 그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경전보다는 율전의 연구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위덕왕 때의 고승 현광(玄光)과 무왕 때의 혜현(惠現)은 『법화경』을 널리 강하였고, 541년(성왕 19)에 성왕이 양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 여러 경전의 주석서를 구해 왔다.
무왕이 익산(益山)에 제석정사(帝釋精舍)를 창건하였을 때에 『금강반야경』을 사경(寫經)하여 칠층탑 속에 봉안했던 것으로 보아 많은 대승경전들이 깊이 연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에서는 성왕과 위덕왕 때에 일본으로 경전을 보냄으로써 불교의 전파에 공헌하였고, 655년(의자왕 15)에 비구니 법명(法明)이 일본으로 가서 『유마경』을 독경함으로써 병을 고쳤다는 사실은 거사불교(居士佛敎)의 근본경전인 『유마경』이 이미 우리나라에서 깊이 연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율장의 경우에는 526년(성왕 4)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율종을 시작하면서 율전의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겸익은 중앙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율부(律部)를 전공하였고,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귀국한 뒤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다.
그 뒤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었다. 겸익이 번역한 율은 『아담장오부율문(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전한다. ‘아담’과 ‘비담’이 아비달마(阿毘達摩)의 준말이므로 이 아비달마율은 근본설일체유부의 유부신율(有部新律)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백제에서 유행했던 율은 신라나 그 뒤의 우리나라에서 전승되었던 사분율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새로운 것이다. 그 뒤 백제에서는 율학이 크게 성행하였고, 일본에 불교를 전파할 때 율사(律師)를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에게 율을 가르쳐 승려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논서에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성왕과 위덕왕 때에 일본으로 논서를 보냄으로써 불교의 전파에 공헌하였고, 도장(道藏)과 의영(義榮)이 각각 『성실론』과 『유가론』에 관한 주석서를 찬술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통일 이전의 신라에 불교경전이 풍부하게 들어오게 된 것은 진흥왕 때부터 중국으로 갔던 유학승들이 귀국하면서부터였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의 문제(文帝)가, 승려 유사(劉思)를 신라의 유학승 명관(明觀)과 동행하게 하여 불교경론 2,700여 권을 전하게 하였다.
그 경전의 이름은 전하여오지 않지만 이것은 신라 불교계를 위하여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한역경전들이 곧바로 유입되어 신라인의 불교이해를 돕게 된 것이며,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본격적인 불교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또 576년에는 수나라에 갔던 안홍(安弘)이 『능가경』 · 『승만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이 두 경은 뒷날 신라 불교에 있어서 가장 으뜸 가는 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또한 『미륵하생경』에 근거하여 신라에서는 화랑(花郎)의 이념을 더욱 구체화하였고, 고승 원광(圓光)에 의하여 『열반경』 · 『반야경』 · 『여래장경(如來藏經)』 ·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도 크게 유행하게 되었으며,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의 성행과 함께 『인왕경(仁王經)』도 많이 유포되었다.
이 밖에도 자장(慈藏)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화엄경』을 가져와 화엄강회를 개최하였고, 『아미타경』에 관한 주석서를 지었다. 율장의 경우 『사분율』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 율종의 전통은 585년(진평왕 7)에 진나라에 갔다가 18년 만에 귀국한 고승 지명(智明)에 의해서라고 보여진다.
그는 계행(戒行)이 청정한 승려로서 계율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인 『사분율갈마기(四分律羯磨記)』 1권을 남겼다. 그러나 신라의 율학이 정립된 것은 자장에 의해서였다. 그는 『사분율』과 『십송률』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을 뿐 아니라 『범망경』의 보살계본(菩薩戒本)을 풀이함으로써 승단의 율을 확립시켰다.
또한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을 엄격히 시행하였으며, 겨울과 봄에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서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고, 순사(巡使)를 보내서 지방의 승려들이 율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자장에 의해 정립된 신라의 계율서는 그 뒤에 통일신라시대의 고승들에 의해 완전히 정착되었다.
논서 또한 중국으로 갔던 유학승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다. 565년(진흥왕 26)에는 명관이 불교 경전과 논서 2,700여 권을 진나라에서 가져왔고,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는 본격적인 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논서들이 유입되어 연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원광(圓光)이 승려가 된 초기에 『성실론』을 연구하였고 후기에 『섭대승론』의 법회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 소승과 대승의 논서들이 함께 연구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에는 교학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다. 원효(元曉) · 원측(圓測) · 의상(義湘) · 경흥(憬興) · 의적(義寂) · 도증(道證) · 승장(勝莊) · 둔륜(遁倫) · 태현(太賢) 등의 뛰어난 고승들과 그 밖의 많은 고승들이 경전연구를 본격화함으로써 그 어느 시대보다도 경전유통이 활발하였다.
그들이 교학의 발전을 위해 많이 연구했던 경전은 『대반야바라밀다경』 · 『금강반야경』 · 『법화경』 · 『화엄경』 · 『대무량수경』 · 『아미타경』 · 『열반경』 · 『금광명경』 · 『범망경』 등이었다.
신앙면에서는 『미륵삼부경』 · 『정토삼부경( 淨土三部經)』 ·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이 매우 중요시되어 대중교화의 근본경전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국가안태(國家安泰)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유행한 『금광명최승왕경』과 『인왕반야경』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밀교의 전래와 함께 『대일경(大日經)』 · 『불공견색다라니경(不空羂索陀羅尼經)』 · 『십일면관음신주경( 十一面觀音神呪經)』 등 많은 밀교계 경전들도 유포되었다. 그러나 경덕왕 이후에는 경전의 연구가 차차 둔화되어 『화엄경』과 『법화경』 등 몇몇 경전 외에는 널리 유행하지 못하였다. 경전유입과 관련된 통일신라시대의 기사는 704년(성덕왕 3) 김사양(金思讓)에 의해 『금광명최승왕경』이 당나라로부터 들어왔고, 799년(소성왕 1)에 범수(梵修)가 『신역후분화엄경징관의소( 新譯後分華嚴經澄觀義疏)』를 가지고 왔으며, 827년(흥덕왕 2)에 구덕(丘德)이 약간의 불경을 가지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했다는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말 선문구산(禪門九山)의 성립 이후 경전을 연구하는 교종(敎宗)은 크게 위축되었고, 그것은 고려 초기까지 계속되었다.
율전의 경우 『사분율』은 원효 · 경흥 · 둔륜 등에 의해 깊이 연구되었고, 『범망경』은 원효 · 승장 · 현일(玄一) · 의적 · 태현 · 단목(端目) 등에 의해 깊이 연구되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 신라에서는 대승계인 『범망경』의 보살계본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 밖에도 유가종의 태현에 의하여 유가계본(瑜伽戒本)의 연구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신라 전체의 율학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유가종』 자체 내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논서의 연구 또한 활발했던 시기였다. 원효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들이 교학연구를 본격화하면서 『광백론』 · 『유가론』 · 『유식론』 · 『아비담잡집론』 · 『인명론(因明論)』 · 『대승기신론』 등에 대한 많은 주석서를 남겼다.
원측 11종, 원효 30여종, 경흥 14종, 지인 3종, 영인(靈因) 1종, 행달(行達) 2종, 순경(順璟) 3종, 도증 7종, 승장 5종, 현일 3종, 오진(悟眞) 3종, 의적 5종, 둔륜 2종, 태현 29종, 연기(緣起) 2종, 대연(大衍) 2종, 견등(見登) 2종, 월충(月忠) 1종, 정달(淨達) 1종, 심상(審祥) 1종 등이 저술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원효의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4권, 『대승기신론소』 2권, 『기신론별기』 1권과 둔륜의 『유가론기』 24권, 대현의 『성유식론고적기(成唯識論古迹記)』 10권, 견등의 『대승기신론동이약집』 2권, 월충의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 10권이 있다.
특히, 이들 논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것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이다. 『대승기신론소』는 『기신론』 3소(三疏) 중의 하나로, 명쾌하고도 원만한 해석은 해동소(海東疏)라는 이름으로 중국 및 일본의 불교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또 『금강삼매경론』은 원효가 처음 저술하였을 때에는 『금강삼매경소』라 하였던 것인데, 후에 중국에서 삼장(三藏)을 번역할 때 소를 논으로 고쳐 부른 것이다. 한국인 찬술 불교관계 문헌 중 정식으로 논장에 편입된 유일한 저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라 말 선문구산의 성립 이후부터는 교학의 연구가 크게 위축되면서 논에 관한 주석서도 거의 찬술되지 않았다.
고려 초기에는 화엄종이 크게 성행하여 『화엄경』의 연구가 활발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천태종(天台宗)을 세운 뒤에는 『법화경』의 연구 및 신앙이 더욱 활발해졌다.
지눌(知訥)이 수선사(修禪社)를 설립하고 『금강경』으로서 문도를 지도하면서 따라 『금강경』의 연구가 본격화되었으며, 이자현(李資賢)과 승형(承逈)이 『능엄경(楞嚴經)』을 중시함에 따라 이후 선가(禪家)의 필수과목으로 존중받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수도승 사이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었던 경전은 『화엄경』 · 『법화경』 · 『금강경』 · 『능엄경』이었다. 또 신앙의 측면에서는 신라 때와는 달리 『아미타경』 · 『법화경』 등이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불경유통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왕실을 중심으로 개최된 수많은 도량(道場)의 개설과 불경과의 관계이다. 갖가지 도량의 개설과 함께 그 경전이 독송되고 유포되었다.
이 중에는 『인왕경』 · 『금광명경』 · 『반야경』 · 『약사경』 ·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밀교경전에 근거하여 복을 비는 도량이 수백 회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전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으며, 논서의 경우에도 각 종파별로 그들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논서들의 연구가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화엄종에서는 『십지경론』, 법상종에서는 『성유식론』을 많이 연구하였고, 지눌은 『화엄론』을 중시하고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를 저술하기도 하였지만, 선종의 성행과 불교계의 타락으로 이미 논서의 연구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조선왕조의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조선시대의 불경연구는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부터 선종에서 크게 유행되었던 『금강경』과 『능엄경』은 계속 연구되었고, 『화엄경』도 교종선(敎宗選)의 시험과목이 되었으므로 그 연구가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조선 초기의 고승인 기화(己和)가 『금강경』과 『원각경』에 관한 주석서를 찬술함으로써 그 뒤 『원각경』도 크게 중시되었다.
조선시대 경전유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세조가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경을 국역인간(國譯印刊)한 것이다. 고승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등을 중심으로 『능엄경』 · 『법화경』 · 『금강경』 · 『반야심경』 · 『원각경』의 언해본이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범망경』 · 『지장경(地藏經)』 등도 간행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 뒤 조선 중기까지는 억불정책과 선종 위주의 불교조류에 의해 경에 관한 연구는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다만 선종의 승려였던 지엄(智嚴)이 『법화경』 · 『화엄경』 · 『능엄경』을 제자들에게 강의하여 불교연구의 지침을 삼게 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선교불이(禪敎不二)를 강조하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선승들 사이에서 다시 경전의 연구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특히 선교양종(禪敎兩宗)마저 유명무실하게 된 명종 이후에는 사찰에 강원(講院)과 선원(禪院) 등의 교육기관이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교과과목으로 경전들이 선서(禪書)들과 함께 채택되었다.
사미과(沙彌科)에는 『반야심경』, 사교과(四敎科)에는 『능엄경』 · 『법화경』 · 『금강경』 · 『원각경』, 대교과(大敎科)에는 『화엄경』이 채택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강원의 교과과목으로, 또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신앙과 공덕의 측면에서는 『법화경』 · 『금강경』 · 『지장경』 · 『아미타경』이 널리 간행, 유포되었고, 효도를 강조하는 『부모은중경』의 간행이 많이 이루어졌다. 율학의 경우에는 그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다만 정해진 율에 따라 수계를 받는 등의 의식 중심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 해인사 · 백양사(白羊寺) · 범어사(梵魚寺) · 통도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심으로 하여 율맥(律脈)이 이어졌다.
1939년 자운(慈雲)이 율종(律宗) 중흥의 서원을 세운 뒤 많은 율전을 간행하였으며, 해인사에 율원(律院)이 설립되어 일타(日陀)를 중심으로 다시 율전의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논서로는 교종선(敎宗選)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던 『십지경론』과 불교전문강원의 사교과 과목이었던 『대승기신론』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불교학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