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백고좌회 ()

목차
불교
의례·행사
불교에서 신라 · 고려 시대에호국을 위해 국가적 행사로 개최한 종교의례. 법회의식.
이칭
이칭
백고좌도량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인왕백고좌회는 불교에서 신라·고려 시대에 호국을 위해 국가적 행사로 개최한 법회이다. 백고좌도량이라고도 한다. 인왕백고좌회는 『인왕반야경』의 지혜에 따라 왕이 나라를 통치해서 평안한 나라가 전개되도록 한다는 뜻이 내재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613년(진평왕 35) 7월에 황룡사에서 처음으로 이 법회가 개설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1020년(현종 11)에 현종이 궁중에 100명의 고명한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외우는 인왕백고좌도량을 열었다. 원종 이후로부터는 이 법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목차
정의
불교에서 신라 · 고려 시대에호국을 위해 국가적 행사로 개최한 종교의례. 법회의식.
내용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읽으면서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법회로 반드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열도록 되어 있는 호국적 의미가 매우 깊은 법회이다. 『인왕반야경』의 호국품(護國品)에서는 갖가지 재난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는 국왕이 이 경을 하루에 두 번씩 외워야 할 것을 설하고 있다.

특히, 이 법회를 개최할 때에는 반드시 불상과 보살상과 나한상을 각각 100개씩 모시는 한편, 100명의 법사를 청하여 강경하도록 하되, 그 100명의 법사들이 각각 높은 사자좌(獅子座)에 앉아야만 한다. 또, 그 사자좌 앞에는 100개의 등불을 밝히고 100가지 향을 태우고 100가지 색깔의 꽃을 뿌려 삼보(三寶)를 공양하여야 한다는 의식 절차도 아울러 설하여 놓았다.

이 의식 자체가 법회를 통하여 내란과 외란을 막고 나라 안팎으로 평안하여지기를 빌기 위해서 베푸는 것이지만, 숨겨진 더 큰 의미는 이를 주관하는 왕이 『인왕반야경』에 설하여진 반야의 지혜에 입각하여 그 나라를 통치할 때 평안한 나라가 전개될 수 있다는 뜻이 잠재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613년(진평왕 35) 7월에 처음으로 이 법회가 개설되었다. 황룡사에서 처음으로 개설된 이 법회에는 원광이 초청되어 『인왕반야경』을 강의하였고, 설법도 하였다. 그 뒤 신라에서는 수시로 이 법회가 개설되었다. 특히, 신라의 고승 원효가 외형상의 이유로 백고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가 후일 『금강삼매경론』의 저술로 크게 이름을 떨쳤던 것도 이 법회와 관련된 유명한 설화이다.

고려에서도 이 법회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찍부터 열렸고 불교 연중행사 중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1020년(현종 11) 5월에 현종은 궁중에다가 100개의 사자좌를 마련하고 100명의 학덕이 고명한 법사를 초청하여 『인왕반야경』을 외우는 인왕백고좌도량을 열었다. 현종은 1027년 10월에도 이 인왕백고좌도량을 열고 『인왕반야경』을 외워 공양하는 의식을 가졌다.

당시의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받아 큰 고역을 치른 시기였기 때문에, 그러한 외적의 침입을 막을 방법을 찾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이 법회에 대한 관심은 더욱 새롭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 뒤 이 법회는 점차로 격년제로 실시하여 10월중 3일간에 걸쳐서 성대하게 열리는 정기적인 행사로 발전되었다.

아울러 법회시에는 3만 명에 이르는 승려들을 공양하는 반승불사(飯僧佛事)를 동시에 개최하게 되었다. 3만반승은 대궐에서 1만 명의 승려를 공양하고 전주지방의 사찰에서 2만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선종 2년(1085)·4년·6년과 예종 6년(1111)·8년·10년·12년·14년·16년 및 인종 9년(1131)·11년·13년·15년·17년·19년·21년·23년의 각 10월에 있었던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문종 2년(1048)과 4년에는 한 달 앞당겨서 9월에 열기도 하였고, 인종 21년(1143)에는 한 달 늦추어서 11월에 열기도 하였다. 의종 때에도 초기에는 격년제로 열려 의종 1년(1147)·3년·5년의 10월에 열렸으나 11년 10월에 열린 후로부터는 1년을 늦추어서 3년마다 열리게 되어 의종 14년·17년·20년의 10월에 이 법회가 개설되었다.

명종 때에 이르러서도 명종 1년(1171)·4년에 의종 때와 같이 3년 만에 열렸으나, 그 뒤에는 4년 만인 명종 8년 10월에 열렸으며, 그 뒤부터는 다시 3년제를 지켜서 개설되었다. 몽고의 침입을 받아서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고종과 원종 때에도 3년제의 인왕백고좌도량을 계속 지키면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고려인의 신심을 더욱 깊게 다졌다.

그러나 강화도의 천도 당시에 베풀어진 법회에서는 그 의식에 사용하였던 의식기구들을 가져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1264년(원종 5) 7월에 김준(金俊)의 정성과 노력으로 『인왕반야경』 102부를 찍어냈으며, 한편 사자좌를 비롯하여 모든 의식기구들을 새로이 마련하게 되었고, 그 의식과 절차, 규모와 제도를 다시 격식에 맞추어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 이후로부터는 이 법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여지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호국의식도량에 대한 원나라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인왕경(仁王經)』
집필자
홍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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