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守眉)의 호는 묘각(妙覺)이고 법명은 수미(守眉)이다. 그는 오늘날의 영암군에 해당하는 전라도 고랑주(古朗州)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 구슬을 남기고 가는 꿈을 꾸고 수미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생몰년은 정확하지 않다.
수미는 13세에 월출산 도갑사(道岬寺)에서 출가하고 20세에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처음에는 교학(敎學)에 뜻을 두고 불경을 강(講)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에서 신미(信眉)를 만나 그와 함께 대장경(大藏經)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그림을 그려도 그 그림에 생명이 없는 것처럼 열심히 경전을 공부해도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참선(參禪)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후 그는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선종판사(禪宗判事)의 지위에 올랐다.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세종은 유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후의 추복(追福)을 위해 김수온에게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일대기인 『석가보(釋迦譜)』를 증보 · 편집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에게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수미는 신미와 그 제자인 학열(學悅) · 학조(學祖)와 더불어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언해 사업에 참여하였다.
1458년(세조 4)에 세조는 경차관(敬差官) 윤찬(尹贊) · 정은(鄭珢)을 해인사에 파견하여 재조대장경 50부를 인출하도록 하였는데, 이때에도 수미는 신미, 학조와 함께 재조대장경 인출 사업에 참여하였다. 수미는 1461년(세조 7)에 설치된 간경도감의 불서 국역 사업에도 신미,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후 수미는 도갑사로 돌아와서 사찰을 중수(重修)하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당시 세조의 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은 시주자가 되어 약사여래삼존불을 조성하여 법당에 봉안하였다. 1464년(세조 10) 수미가 도갑사를 중건하고 있을 때 세조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수미를 도와주라고 명하였다. 또한 세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묘각(妙覺)이라는 호를 내리며 가사(袈裟)와 유리구슬 · 불자(拂子) 등을 하사하였다.
수미가 입적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입적할 당시 그의 세속 나이는 63세, 법랍(法臘) 51세였다고 한다. 수미의 부도는 현재 도갑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