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보상절 ()

석보상절 권23, 24
석보상절 권23, 24
언어·문자
문헌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불교경전. 언해본 · 갑인자.
내용 요약

『석보상절』은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불교경전이다. 총 24권으로 추정되며 갑인자와 한글 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이다. 왕비 소헌왕후가 돌아가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편찬하였다.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최초의 책으로, ‘석보’는 석가모니의 전기를 의미하고 ‘상절’은 중요한 내용은 자세히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 쓴다는 뜻이다.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산문 자료로서 문체가 자연스러워 당시의 언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국어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정의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불교경전. 언해본 · 갑인자.
개설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최초의 책이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은 종요로운 내용은 자세히〔詳〕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節〕 쓴다는 뜻이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서문의 “정통십이년칠월이오일 수양군휘서(正統十二年七月二五日 首陽君諱序)”의 기록에 따라 1447년(세종 29)으로 추정된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의 동기와 목적, 편자 등에 대해서는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 앞에 실려 있는 「석보상절서」와 「어제월인석보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1446년(세종 28)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석보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수양대군이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남제(南齊)의 승우(僧祐)가 편찬한 『석가보(釋迦譜)』와 당(唐)의 도선(道詵)이 편찬한 『석가씨보(釋迦氏譜)』를 참조하여 새롭게 편찬하고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한다.

서지적 사항

전편(全篇)은 모두 24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원간본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권6, 권9, 권13, 권19,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권23, 권24, 호암미술관 소장의 권20, 권21이 있다. 특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4책은 본문과 난상(欄上)에 묵서로 교정까지 되어 있어서, 이 책 간년의 추정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구리로 주조된 한자 활자인 갑인자(甲寅字)]와 함께 쓰는 한글 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이다.

인쇄에 사용된 한글 활자는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의 고딕체와 모양이 유사하다. 한글의 자형(字形)은 자음자의 획이 직선으로 되고, 방점과 아래아(ㆍᆞ)가 둥근 점(點)으로 되어 한글 창제 당시의 모습을 보인다. 다만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점으로 되어 있던 ‘ㅏ, ㅑ, ㅓ, ㅕ’의 가로획과 ‘ㅗ, ㅛ, ㅜ, ㅠ’의 세로획은 직선으로 바뀌었다.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가 보여주는 한글 자형과 같다고 하겠다.

이 한글 활자는 『석보상절』을 간행하기 위하여 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월인천강지곡』『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에도 이 한글 활자가 사용되었다.

『석보상절』은 16세기 이후 부분적으로 중간되었다. 권3(천병식 소장)과 권11(호암미술관 소장)이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원간본을 번각(飜刻)한 것이어서, 일부 오 · 탈각을 제외하고는 원간본과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권11은 국립중앙도서관, 동국대학교 소장의 원간본과 함께 1970년 보물로 지정되어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영인 사항

국립도서관 소장의 원간본 권6, 권9, 권13, 권19는 『한글』 111~125호(1955~1959)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1961년 한글학회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한 대제각 재영인본이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었으나, 이들 영인본에서는 원전의 교정이 삭제되어 있다. 199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원전의 복사본을 다시 영인한 바 있다.

동국대 소장의 권23, 권24는 1969년 문교원에서 원척(原尺)으로 영인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한 김영배(1972)와 대제각 재영인본이 널리 이용되어 왔다.

번각본 권11은 1959년 대구어문학회에서 영인되고, 1991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재영인되었다. 번각본 권3은 1985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되었다.

내용

책의 내용은 석가족의 연출(緣出)로부터 석가모니의 전세 이야기, 그리고 현세에서의 석가모니의 탄생, 성장, 출가, 성불, 멸도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사후의 경률(經律)의 결집(結集), 불법(佛法)의 유포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 등 석가모니가 설법한 주요 불경 내용이 석가의 일대기 속에 함께 실려 있어 기존에 중국에서 편찬되었던 『석가보』 등과 편찬 방식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

편찬 순서는 팔상도(八相圖) · 주1 · 주2 · 주3 · 주4 · 주5 · 주6 · 주7 · 주8의 순서를 따랐다.

의의와 평가

『석보상절』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산문 자료이다. 특히 15세기의 다른 언해서들과는 달리 한문 원문이 없고 또한 문체도 자연스러운 점에서 당시의 언어 사실을 더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표기법에 있어서도 같은 세종대의 문헌인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과는 달리 8종성법 등 음소적 표기법만을 보여 준다. 비록 동명사형 표기에서 ‘ㄹㆆ+단일초성’과 ‘ㄹ+각자병서’의 두 가지 방식의 혼용(디니ᇙ 사ᄅᆞᆷ, 디닐 싸ᄅᆞᆷ), 의 표기 위치(닷가, 다ᄭᅡ; 부텻긔, 부텨ᄭᅴ), 의 표기 위치(야ᅌᆞᆯ, 야ᇰᄋᆞᆯ) 등 부분적인 표기법의 혼란은 있으나, 이는 정음창제 초기에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몇 가지 표기법에 한정되는 문제이다. 또한 이 표기법의 혼란은 전체 24권이라는 분량의 방대함에서도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표기법은 그 이후의 한글 표기법의 전범(典範)이 된다. 한자음 부기(附記)의 방식도 그러하다. 15세기 한글 문헌들은 각 한자별로 그 아래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부기하는데 그러한 방식의 최초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부기된 한자음 가운데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한자음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소수 존재한다. “鬼 · 귕, 勞롱, 部:뿡, 最:죙, 化:황, · · · ”(참고:동국정운음, :귕, 로ᇢ, :뽕/:뿌ᇢ, · 죙, · 황, · · · ). 이는 두 문헌의 편찬시기의 선후와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한자어의 표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더 많은 한글 표기를 보여 주는데(위두, 미혹, 푸ᇰ류, 위ᄒᆞ-, 뎐디ᄒᆞ- · · · ) 이는 이 문헌의 편찬자가 상정하고 있던 독자층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석보상절』이 학문적으로 갖는 가치는 첫째, 불교학적인 면에서 당시의 불교를 조직화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학 수준을 말하는 것이며, 최초의 번역 불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둘째, 문학적인 면에서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지만, 문장이 유창하고 세련되어 후대의 고전소설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셋째, 국어학적으로는 그 풍부한 어휘와 이에 따른 어법 · 음운 · 표기법 등 15세기 중엽의 국어 연구 및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서지학적으로는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최초의 국문 활자본이란 점에서 값진 문화재로서 가치가 인정된다.

참고문헌

『석보상절의 서지와 언어』(이호권, 태학사, 2001)
『석보상절 제이삼·이사 주해』(김영배, 일조각, 1972)
『주해 석보상절』(리동림, 동국대학교출판부, 1959)
「조선초기의 역경-최초의 역경『석보상절』을 중심으로」(김영배, 『대각사상』5집, 대각사상연구원, 2002)
「새로 발견된 석보상절 권삼 해제」(천병식, 『국어교육』38, 1981)
「석보상절의 교정에 대하여」(안병희, 『국어학』 2, 1974)
「석보상절 제이삼·이사 해제」(이병주, 『동악어문논집』5, 1967)
규장각 한국학연구원(www.kyujanggak.snu.ac.kr)
디지털한글박물관(www.hangeulmuseum.org)
주석
주1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옴.

주2

룸비니 동산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

주3

석가모니가 태자 때 가비라성(迦毗羅城)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만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했다는 고사.    우리말샘

주4

성을 넘어 출가함.

주5

석가모니가 전세(前世)에 설산에서 행한 수도.    우리말샘

주6

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음.

주7

녹야원에서 설법함.

주8

석가모니가 사라쌍수의 숲에서 열반에 듦.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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