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1책 24장, 갑인자본이다. 1449년(세종 31)에 간행되었다. 반곽(半郭) 크기는 22.0x15.9cm이고 9행 15자이다. 큰 글씨로 본문을 쓰고, 소자 쌍행으로 주석을 달았다. 쌍행 주는 내불당의 규모, 삼불 예참문(三佛禮懺文), 세종이 지은 악장(樂章), 연행에 동원된 악기의 종류와 숫자, 점안식 및 낙성식의 소(疏), 정근 입장 인명(精勤入場人名) 등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동국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六堂文庫) 등에 1부씩 소장되어 있다. 한편, 쌍행 주를 제외한 본문은 김수온의 문집인 『식우집(拭疣集)』 권2에도 수록되어 있다.
『사리영응기』의 내용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요약된다.
불당 건설과 불상 조성: 1448년(세종 30) 7월 19일, 세종은 의정부에 전교하여, 태종이 일찍이 문소전(文昭殿) 곁에 불당(佛堂)을 세워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빌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불당을 경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선왕의 원을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음을 밝히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정공(鄭恭)과 중추원사(中樞院事) 민신(閔伸) 등에게 불당을 경영하게 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에게 새로운 불당을 짓는 일을 총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왕명에 따라 궁성 북쪽에 터를 잡고 7월 28일 기공하여 11월 20일에 준공하였다. 불전 1칸, 승당 3칸, 선당(禪堂) 3칸, 정문과 주방과 곳간 등이 26칸이었다. 또 황금으로 삼존불을 조성하고, 약사여래와 아미타불, 보살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여 모셨다.
삼불 예참문을 지으라 명함: 대자암(大慈庵)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으로 하여금 삼불 예참문을 짓게 하였다.
친제신성(親製新聲)과 악장(樂章):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 · 「발대원지곡( 發大願之曲)」 · 「포법운지곡(布法雲之曲)」 등 새로운 악곡(樂曲) 7수를 만들고, 「귀삼보(歸三寶)」 · 「찬법신(贊法身)」 · 「찬보신(贊報身)」 · 「찬화신(贊化身)」 등 9수의 악장(樂章)을 만들었다.
점안 법회(點眼法會)와 낙성 법회(落成法會)로 이루어진 경찬회(慶讚會): 11월 18일 세종은 궁궐 안에서 재계하고 백관에게 형벌과 도살을 금한 뒤 51명의 비구승을 새 절에 모아 융성하게 재를 베풀고 새로 조성한 불상을 점안하였다. 12월 6일 낙성식을 개최하여 세종은 곤룡포 두 벌과 침수향 1봉을 석가여래상에 올리고, “나의 효성이 능히 부처님을 감동시켜 대중에게 감응을 보이기를 지성으로 기원한다.”라고 발원하였다. 모인 사람 261인이 깊이 참회하였다.
경찬회에 대한 찬미: 그때에 불전에서 방광하고 사리탑 앞에서 사리 두 개가 나타났는데, 광채가 찬란하였으므로 모인 사람들이 세종과 함께 크게 경탄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근 입장 인명: 경찬회에 참여하여 참회한 261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승려, 종친과 의빈, 조관 등을 차례로 기록하였다.
『사리영응기』는 조선 초 불교뿐만 아니라 서지학과 국어, 문학 등 조선 초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세종 대 후반 세종의 불사(佛事)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어, 내불당 불사, 사리 신앙을 비롯한 세종의 불교 정책과 신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韓실구디, 朴검도ᇰ’ 등 한글로 표기된 이름이 약 50개 나타나 있어 고유어로 된 인명의 연구 자료로 이용된다. 인명 표기의 한글 활자가 『석보상절』 등의 그것과 일치하며, 갑인자(甲寅字)로 인쇄되어 조선 초 활자본 연구 등 서지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친제신성과 악장 등은 조선시대 불교 음악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