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년(태종 18)에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넷째 아들 소경공 성녕대군(昭頃公 誠寧大君)이 13살의 나이로 주1 주2 위해 세운 원당(願堂)이다. 대자암의 토지가 250결(약 60만 평)에 이르고 120명의 승려를 비롯해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한 왕실 원찰(願刹)이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세종(世宗)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안평대군(安平大君) · 수양대군(首陽大君) 등이 주3에 참석하여 사경(寫經)을 독려하였다.
대자암을 창건하고 행호(行乎)를 주4로 삼았고 무학 자초(無學 自超)의 수제자인 진산(珍山)이 주지로 재임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무학의 제자인 함허 기화(涵虛 己和)를 대자암 주지로 삼았다. 기화는 1424년(세종 6)까지 대자암에 머물면서 성녕대군과 원경왕후의 천도(薦度) 법회(法會)를 개설하였다. 1449년(세종31)에 혜각존자 신미(慧覺尊者 信眉)가 대자암 주지에 재임하였다.
1421년에 종파를 통폐합할 때 선종(禪宗)의 18개 사찰에 소속되었다. 그 후 1449년(세종31)에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수륙대재를 주5. 수양대군은 여러 형제와 함께 대자암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문종(文宗)은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108인의 승려를 모아 법회를 열었다. 1451년(문종 1)에 세종의 3재와 5재를 지내고 소헌왕후의 추념을 위해 『법화경』 7권, 『법망경』 2권, 『능엄경(楞嚴經)』 10권, 『미타경』 1권, 『관음경(觀音經)』 1권, 『지장경(地藏經)』 3권, 『미타참』 10권, 『십륙관경』 1권, 『기신론』 1권 등을 주6로 주7. 1452년 단종(端宗)은 문종을 위한 주8와 3재, 그리고 5재를 열었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주9의 위기를 맞았다. 그 후 대자암에 인조(仁祖)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로 조성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그 터에 경안대군(慶安大君)의 묘를 봉하면서부터 그 주10는 묘사(墓舍)가 되었다. 그 북쪽의 약 100보 지점에 절을 짓고는 명적암(明寂庵)이라 하였다. 성재 민이승(誠齋 閔以升, 1649~1698)이 대자암에서 독서하였다고 알려져있다. 현재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소는 경안군과 임창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 문중(門中) 소유로 되어 있으며 고양시의 담당이다.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에 안평대군이 대자암에서 사경한 『묘법연화경』이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