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산 대자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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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大慈山)에 창건된 암자. 대자사(大慈寺) 명적암(明寂庵).
이칭
이칭
대자사(大慈寺), 명적암(明寂庵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1418년에 1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태종과 비 원경왕후가 세운 원당이다. 대자암의 토지가 250결에 이르고 120명의 승려를 비롯해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한 왕실 원찰이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 안평대군·수양대군, 문종과 단종 등이 참여한 왕실 원당이었다. 행호와 무학의 수제자인 진산과 기화, 신미가 주지로 재임하였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사되어 갔다. 그 후 대자암에 인조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로 조성되어 곁에 명적암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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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大慈山)에 창건된 암자. 대자사(大慈寺) 명적암(明寂庵).
건립 경위

1418년(태종 18)에 태종(太宗)원경왕후(元敬王后)의 넷째 아들 소경공 성녕대군(昭頃公 誠寧大君)이 13살의 나이로 주1 주2 위해 세운 원당(願堂)이다. 대자암의 토지가 250결(약 60만 평)에 이르고 120명의 승려를 비롯해 수백 명의 승려가 상주한 왕실 원찰(願刹)이었다.

변천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세종(世宗)의 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안평대군(安平大君) · 수양대군(首陽大君) 등이 주3에 참석하여 사경(寫經)을 독려하였다.

대자암을 창건하고 행호(行乎)주4로 삼았고 무학 자초(無學 自超)의 수제자인 진산(珍山)이 주지로 재임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무학의 제자인 함허 기화(涵虛 己和)를 대자암 주지로 삼았다. 기화는 1424년(세종 6)까지 대자암에 머물면서 성녕대군과 원경왕후의 천도(薦度) 법회(法會)를 개설하였다. 1449년(세종31)에 혜각존자 신미(慧覺尊者 信眉)가 대자암 주지에 재임하였다.

1421년에 종파를 통폐합할 때 선종(禪宗)의 18개 사찰에 소속되었다. 그 후 1449년(세종31)에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수륙대재를 주5. 수양대군은 여러 형제와 함께 대자암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문종(文宗)은 세종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고 108인의 승려를 모아 법회를 열었다. 1451년(문종 1)에 세종의 3재와 5재를 지내고 소헌왕후의 추념을 위해 『법화경』 7권, 『법망경』 2권, 『능엄경(楞嚴經)』 10권, 『미타경』 1권, 『관음경(觀音經)』 1권, 『지장경(地藏經)』 3권, 『미타참』 10권, 『십륙관경』 1권, 『기신론』 1권 등을 주6주7. 1452년 단종(端宗)은 문종을 위한 주8와 3재, 그리고 5재를 열었다.

대자암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주9의 위기를 맞았다. 그 후 대자암에 인조(仁祖)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소로 조성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그 터에 경안대군(慶安大君)의 묘를 봉하면서부터 그 주10는 묘사(墓舍)가 되었다. 그 북쪽의 약 100보 지점에 절을 짓고는 명적암(明寂庵)이라 하였다. 성재 민이승(誠齋 閔以升, 1649~1698)이 대자암에서 독서하였다고 알려져있다. 현재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소는 경안군과 임창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 문중(門中) 소유로 되어 있으며 고양시의 담당이다. 하버드대학 옌칭 도서관에 안평대군이 대자암에서 사경한 『묘법연화경』이 보존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가람고(伽藍考)』
『범우고(梵宇攷)』
『신증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화계사약지(華溪寺畧誌)』

단행본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가산불교대사림』 4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1)
주석
주1

젊은 나이에 죽다. 우리말샘

주2

죽은 사람을 생각하다. 우리말샘

주3

설법, 독경, 강경(講經),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우리말샘

주4

절을 주관하는 승려. 우리말샘

주5

뜻을 받들어 행하다. 우리말샘

주6

금박을 올리거나 금빛 수실로 수를 놓거나 금물로 써서 금빛이 나는 글자. 우리말샘

주7

글씨를 베끼다. 우리말샘

주8

사람이 죽은 뒤 첫 이레 만에 올리는 재. 우리말샘

주9

폐하여져 승려가 없는 절. 우리말샘

주10

예전에 건물 따위가 있었거나 사건이 일어나 역사적 자취가 남아 있는 자리. 우리말샘

집필자
황인규(동국대 역사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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